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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서 칼럼] 자기주도적이라는 환상 - 중동태적 삶

이진서

우리는 흔히 ‘자기주도적 삶’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지 모른다. ‘주도한다’는 말은 행위의 원천이 오직 개인의 의지에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며, 타자의 개입과 사건의 돌발 속에서 전개된다.

 

나는 최근 뇌경색을 겪으며 자율적 의지가 삶의 전부라는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대뇌와 소뇌를 잇는 연수의 혈관이 찢어지는 순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타인의 손길과 제도적 장치에 의해 나는 살아남았다. 그때 내게 찾아온 감각은 ‘내가 산다’가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삶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사건을 통해서야 비로소 진실을 드러낸다. 익숙한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삶의 지층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책임의 생성》(2025, 에디토리얼)은 바로 이 지점을 철학적으로 파고든다. 근대적 주체 개념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분에 의존한다. 행위자는 ‘하는 자’이고 객체는 ‘당하는 자’라는 구조 속에서 세계가 배열된다. 그러나 중동태는 이 이분법의 바깥, 혹은 그 사이의 모호한 지대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걷는다. 그러나 동시에 걷게 된다. 나는 산다. 그러나 살아지기도 한다. 나는 내가 앓은 질병을 통해 이 중동태적 삶의 조건을 극적으로 체험했다. 인간은 삶을 스스로 설계한다고 믿지만, 실은 던져진 조건 속에서 이미 살아지고 있는 존재다. 나의 경험은 이 ‘던져짐’을 신체적 차원에서, 생생한 감각으로 각인시켰다.

 

물론 이것이 내가 더 이상 의지를 지닌 존재가 아님을 뜻하지는 않는다. 재활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를 다잡고, 글을 쓰며, 다시 살아가려는 결심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고립된 자율적 의지의 산물이 아니었다. 나를 일으킨 것은 가족의 돌봄, 의료진의 전문적 개입, 사회적 제도의 안전망이었다. 다시 말해, 자율성이란 고립된 주체의 힘이 아니라 타자와의 연루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나의 자율성은 내 소유가 아니라 타자의 응답을 통해 열리는 가능성이다.

 

이 성찰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향한 불평과 냉소의 언어는 자신을 능동적 주체로만 상정하고 타인의 곤란을 외부화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중동태적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누구나 언제든 곤란 속에서 “살아지게 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곤란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도 하다. 곤란은 관계적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시민적 책임을 요청받는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행위(action)의 정치학'과 맞닿는다. 행위란 고립된 결단이 아니라 함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응답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답(response)이다. 응답은 단순한 반응(reaction)과 다르다. 반응은 기계적이지만 응답은 사건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창조적 행위다. 내가 뇌경색 이후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이 응답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고통과 곤경은 사적 체험에 머물지 않고, 관계를 묻고 사회적 변화를 요청하는 공적 사유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중동태적 삶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윤리의 자리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과 관계 속에서 ‘살아지고 있으며’, 그 연루 속에서만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율성이란 고립된 주체의 독립적 힘이 아니라 연루됨 속에서 응답할 수 있는 용기와 책임이다. ‘살아진다’는 감각은 무력감이 유발하는 체념이 아니라 타자와 세계에 응답하게 만드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이 응답의 윤리야말로 오늘 우리가 다시 사유해야 할 삶의 원리일 것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5.09.15 10:58 수정 2025.09.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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