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고린도전서 8장 강해를 따라 ‘우상의 제물’ 논쟁 속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복음의 기준을 오늘의 삶에 자연스럽게 적용합니다. 고대 도시 고린도의 맥락부터 바울의 실제적 권면, 21세기 그리스도인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아디아포라 문제까지 유기적으로 풀어 성경적 분별과 공동체적 지혜를 제시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성경의 고대 세계를 오늘의 골목과 식탁, 직장과 예배당으로
끌어와 한 구절도 삶의 바깥에 남겨 두지 않는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본문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며, 신학을 생활의 언어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 8장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상의 제물’이라는 다소 낯선 주제가 사실은 신앙의 자유와 공동체의 책임, 지식과
사랑의 질서를 가르는 결정적 관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 준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바울의 이 한 문장이 장재형목사의 해석에서 단순한 표어가 아니라 판단의 좌표로 기능한다. 무엇이 허용되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것이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가를
먼저 묻는 태도. 바로 그 지점이 성숙의 시작이다.
고린도는 신전과 제사가 도시의 일상을 지탱하던 항구도시였다. 제사에
올려진 고기는 시장으로 흘러가 유통되고, 연회 자리에서 널리 소비됐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피한다는 것은 단순한 식단 조절이 아니라 생활 방식의 총체적 재편을 뜻했다. 교회 안에는 자연스럽게
두 흐름이 생겼다. 한쪽은 ‘지식이 있다’고 여긴 사람들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고전 8:4)는 올바른 교리를 근거로 자유를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막 회심해 과거의 관습과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이들로,
같은 행위를 양심의 상처와 배교의 그림자로 느꼈다. 장재형목사는 이 긴장이 취향의 차이나
성품의 문제라기보다, 무엇을 신앙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가—지식이냐
사랑이냐—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짚는다.
흥미로운 대목은 바울이 ‘지식 있는 자’의 신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물이 주께로부터” 왔고,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주님의 것”(고전 10:26)이라는 고백은 참이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출처를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되고, 불신자의
초대를 받아 차려진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을 자유도 있다(고전 10장). 장재형목사는 이 인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자유는 실제이며, 신학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자유 위에 사랑을 최상위 원리로 세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분량의 믿음과 같은 강도의 양심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옳음’이 증명되더라도, 그 옳음을 행사하는 방식이 형제를 무너뜨린다면 그
지식은 사랑 앞에서 실패한다. 진리는 내용만으로 진리가 아니며, 사랑
속에서 적용될 때 교회를 세우는 진리가 된다.
그래서 바울의 초점은 “할 수 있느냐”에서 “해야 하느냐”로
이동한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지식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모습을 약한 형제가 보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양심이 담대해지는 척하며 따라
하다가 결국 상하고 무너질 수 있다(고전 8:10-11). 바울은
그 형제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라고 부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호칭의 무게를 놓치지 않는다. 내 사소한 자유의
과시가 십자가의 피로 사신 한 영혼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례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죄다(고전 8:12). 그러므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13). 이것은 율법주의의 회귀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자발적 속박’이며, 자유의 가장 높은 형태다. 무엇이든 할 자유보다 사랑을 위해 하지
않을 자유가 더 강하다. 이 절제가 덕을 세우고, 덕이 공동체를
살린다.
이 원리는 10장과 로마서 14장에서
더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4),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장재형목사는 이 흐름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원리상 허용될 수 있는가. 둘째, 실제로 누군가에게 유익을 낳는가. 셋째,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이 세 질문을 통과하면 자유는 사랑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오늘 우리는 신전 식당 대신 다른 장면을 마주한다. 음주와 흡연, 문화 콘텐츠 소비, 정치적 발언,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돈의 사용, 직장 관행
등 수많은 아디아포라에서 매일 선택한다. 어떤 이는 예술을 즐기되 양심 안에서 선을 지키고, 어떤 이는 같은 장르를 신앙에 해롭다고 판단한다. 어떤 이는 공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고, 어떤 이는 그것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럴 때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좌표를 현재형으로 제시한다. 당신의
옳음이 누군가의 넘어짐이 되지 않도록, 당신의 자유가 누군가의 양심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당신의 확신이 누군가의 구원을 가리지 않도록. 판단의 축은 ‘내가 괜찮은가’에서 ‘그에게
유익한가’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약한 자’에
대한 오해도 바로잡는다. 약함은 공부를 덜 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문화적 배경, 민감한 양심이 빚어 낸 복합적 상태일 수 있다.
그러니 성숙한 신자는 설명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사랑으로 보호한다. 시간이 흐르면 양심은 단단해지고
자유의 지평은 넓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강요가 아니라 배려 속에서만 가능하다. 바울이 옳음으로 굴복시키지 않고 보호로 감싸 안았듯, 교회는 자유의
학원이기 전에 사랑의 안식처여야 한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양심은 담대해지고, 담대한 양심은 넓은 자유를 기쁨으로 누린다.
동시에 사랑을 핑계로 타인의 양심을 통제하려는 유혹도 경계해야 한다. 개인의
금욕 기준을 보편 윤리로 일반화해 남을 재단하는 것은 반대 방향의 교만이다. 바울의 길은 ‘자유를 강요’하는 길도, ‘금욕을
강요’하는 길도 아니다. 그는 자유를 사랑으로 스스로 제한했고, 절제를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핵심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극단—자유의 오남용과 금욕의 강요—을 동시에 피한다. 한쪽은 타인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다른 한쪽은 복음의 기쁨을 왜곡한다. 사랑의 덕은 그 사이에서 개인의
성숙과 공동체의 평안을 함께 세운다.
장재형목사는 일상의 장면에서 이 원리를 들려준다. 회식 문화에서
술 권유를 거절하기 어려운 후배가 있다면, 자유를 아는 선배가 먼저 배려의 언어로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가족 모임에서 신앙과 취향이 엇갈릴 때, “나는 문제 없어”라는 선언보다 “너에게 유익한 길”을
선택하는 침묵이 더 큰 사랑이 될 때가 있다. 사역 현장에서도 본질이 아닌 영역에서 내 스타일을 관철하기보다
그의 성장을 돕는 선택을 할 때, 공동체는 보이지 않게 단단해진다. 사랑은
구체적이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며, 오래 참는다. 이런 선택이 쌓일수록 교회는 논쟁의 장에서 배움의 장으로, 대립의
장에서 배려의 장으로 바뀐다.
한 영혼의 가치를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바울은 대답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고전 8:11). 십자가에서 값 주고 사신 그 형제를, 내 자유의 과시로
실족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내 권리의 포기로 살려 내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나의 권리 목록’보다 ‘그의 유익 목록’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 자유는 사랑의 도구가 되고, 지식은 섬김의 기술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옳고 그름의 승부처가 아니라, 덕과 유익을 배우는
훈련장이 된다.
경계도 필요하다. 전도서의 말처럼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 물린다(전 10:8). 스스로 세운 신앙의 기준은 우리를 유혹에서 보호하는
울타리다. 동시에 그 울타리가 타인을 옭아매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권고는 본질이 아닌 영역에서도 사랑의 관점으로 판단하라는 초대다.
어떤 모양으로든 악하게 보일 소지가 크고, 누군가의 양심을 아프게 할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 성숙이다. 그 포기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정수다. 사랑을 위한 절제는 언제나 해방을 낳는다.
결국 고린도전서 8장은 이렇게 수렴된다. 지식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만, 사랑은 서로를 세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목소리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들려준다. 자유를
넘어 사랑의 덕으로. 우리가 이 부르심에 응답할 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는 분별이 몸이 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라는
고백이 습관이 된다. 그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다른 종류의 자유—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할 줄 아는 자유—를 보게 된다. 바로
그 자유가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며, 끝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지식은 필요하지만, 사랑이 인도할 때에만 지식은 교만을 벗고 덕을
세운다. 우리의 매일의 선택에서 이 원리가 작동할 때, 논쟁은
배려로, 권리는 구원으로, 확신은 찬송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끝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이야말로 자유의
가장 찬란한 얼굴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