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 로마서 12장, 요한복음 9장을 토대로 ‘새로워진 삶’을 세련된 언어로 해설합니다. 화해에서 출발해 은사로 섬기고, 작은 순종으로 오늘을 변혁하는 실제적 길을 제시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선언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리스도인의 ‘새로움’을 단순한 의지력의 강화가 아니라 존재의 체계가 뒤바뀌는 창조의 사건으로 풀어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은 과거의
실패가 더 이상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삶의 중심축을 재배열한다는 뜻이다. 이 새로움의 관문은 화해다. 십자가 앞에서 낡은 자아가 퇴장하고,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삶의 좌표가 새롭게 그려진다. 바울의
고백,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는 이 변환의 핵심을 정확히 요약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덧붙였다. 어제의 나—상처에 과민하고
인정에 목매는 자아—를 십자가에 내려놓고, 오늘의 의지와
선택을 성령께 맡기는 반복 훈련 속에서만 참된 새로움이 체화된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작고 지속적인 순종이 새 삶의 재료다.
이 새로움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결을 바꾼다. 로마서 12장의 ‘한 몸’ 비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지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카리스마’의 신학으로 확장한다. 은사는
소수의 영웅에게 부여된 초능력이 아니라, 은혜가 모든 지체에게 다른 형태로 스며든 보편적 선물이다. 누군가는 말로 길을 열고(예언),
누군가는 묵묵히 현장을 받치며(섬김), 누군가는
복잡함을 이해 가능하게 번역하고(가르침), 누군가는 주저앉은
마음에 다시 일어설 이유를 불어넣는다(권면). 또 어떤 이는
물질로 빈 곳을 채우고(구제), 질서를 세워 흐름을 만들며(다스림), 상처 옆에 오래 머무는 섬세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지킨다(긍휼). 중요한 것은 역량보다 태도다. 구제는 성실하게, 다스림은 부지런하게, 긍휼은 기쁘게. 은사는 스포트라이트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이며, 태도는 그 통로를 평탄하게 다지는 방식이다. 직장에서
지친 동료에게 건네는 한 문장, 가정의 사소한 수고를 기꺼이 떠안는 손, 교회의 보이지 않는 빈틈을 메우는 발걸음—이 보편의 몸짓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드러난다.
새로움이 현실의 고통과 어떻게 만나는지는 요한복음 9장에 분명히
담겨 있다.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를 보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는 순간, 시선은 과거 원인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방향을 전환한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복음은 원인 규명보다 목적 발견을 앞세운다. 설명이 다 갖춰져야 움직일 수 있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길이 열린다. 진흙을 발라 씻으라는 명령 앞에서 맹인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움직였고, 그 순종이 시야를 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새로움의 문법이라 부른다. 원인 분석의 닫힌 회로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열려 있는 회로로의 전환. 바로 그 전환이 삶의 구조를 바꾼다.
이 이야기를 감싸는 당시 유대 종교 체계는 거대하고 정교했다. 성전은 24반차 제사장들에 의해 치밀하게 운영되었고, 회당은 어린 시절부터
토라를 토론하는 살아 있는 학습장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견고한 시스템이 인간의 연약함을 자동으로 상쇄하지는
못했다. 천사의 수태고지로 태어난 세례 요한조차 옥에서 흔들리며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는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선언하심으로, 인간적 서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드러내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를 통해, 아무리 정교한 제도와 화려한 전통일지라도 ‘지금-여기의 작은 순종’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사야의 약속—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는 거대한 전략보다 끈질긴 순종의 축적에서 실체를 얻는다.
이 흐름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자연스럽게 형상화된다. 고린도후서 5장이 말하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특정 직군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한 모든 이에게 배당된 소명이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사야의 외침은 지금도 교회의 윤리적 의무다. 위로는 현실을 부정하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이 여실 내일을 함께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여기서 은사는 다시 의미를 얻는다. 누군가는 언어로 위로하고, 누군가는 행동으로 메우며, 누군가는 흐트러진 판을 정돈하고, 누군가는 눈물로 곁을 지킨다. 은사가 사랑에 뿌리내릴 때 사명은 확장되고, 은사가 과시로 기울
때 사명은 쉽게 왜곡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무엇을 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하느냐’를
강조한다. 태도는 신학을 실천으로 번역하는 윤리적 매개이며, 그
태도가 복음을 운반한다.
한편 새로움은 쉽게 상투화된다. 통찰은 습관으로 희미해지고, 감동은 형식 속에 갇히기 쉽다. 로마서 12장 서두의 권면—“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이 그래서 결정적이다. 마음의 갱신은 낯선 비법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성도의 식탁과 섬김이라는 오래된 길에서 솟는다. 최신 유행이 아니라
익숙한 훈련이 새 바람을 일으킨다. 직장에서는 정직을, 가정에서는
용서를, 교회에서는 섬김을, 이웃에게는 긍휼을 선택하는 일상의
반복이 새로움을 보존한다. 하루를 여는 짧은 말씀 묵상, 감사를
기록하는 한 줄, 진심 어린 안부를 묻는 문자—작지만 꾸준한
습관이 신앙의 체력을 만든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인물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방식이 중심이다. 그는 본문을 불필요하게 난해하게 만들지 않고, 성경이 우리 방식과 속도를 바꾸도록 길을 터준다. 일터와 가정, 교회와 골목—본문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약속은 과거의 기적을 회상하라는
초대장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서로의 은사를 연결할 때 목도하게 될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청년부의 조용한 봉사, 작은 모임의 기도, 지역사회를 향한 나눔, 오해 앞에서 한 발 양보하는 태도—이 미세한 움직임이 쌓일수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밀도는 높아진다.
새로움은 세계를 읽는 질문도 바꾼다. 우리는 흔히 “왜 이런 일이?”를 묻지만, 복음은 “무엇을 위해?”를 묻도록 이끈다.
원인 탐문은 종종 책임 공방으로 귀결되지만, 목적 질문은 행동을 촉발한다. 설명보다 순종, 계산보다 사랑, 불안보다
믿음—이 단어들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즉시 삶의 궤적은 달라진다. 바리새인들이
체계 바깥에서 일어난 새로움에 당황했듯 우리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불편을 회피하면 마음은
굳고, 믿음으로 통과하면 마음은 유연해진다. 유연함은 은혜가
빚는 결이며, 은혜가 흐르는 자리에서 상처조차 새로운 시작의 밑거름이 된다.
결국 “새로운 피조물”은
수사적 미사여구가 아니라 신분 선언이다. 과거의 실패는 더 이상 내 이름표가 아니며, 현재의 부족함은 내일을 구속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현재형 명령으로 초대한다. 보라—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서로의
은사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을, 작은 순종이 열어젖히는 내일을. 그리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실천하라. 그 한 걸음이 내일의 두 걸음을 낳는다. 작은 축적은 가정의 공기를 바꾸고, 직장의 문화를 덜 날카롭게 만들며, 교회의 기도를 깊게 한다. 그때 우리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완전히 새롭게 된 삶’의 산증인으로 서게 된다. 교회는 자기 보존에 급급한 모임을 넘어, 도시의 상처를 봉합하는
손, 어두운 골목에 등을 켜는 빛, 절망의 소음을 낮추는
위로의 목소리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새로움’의 복음은 그 변화를 위한 엄숙한 초대이며, 그 초대에 응답하는 이들에게
성령은 언제나 충분하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며, 각자 받은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라.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