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꽤나 많은 정의를 가질 수 있다. 한 서양인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구를 알아야 유식자라도 되는 듯 우쭐대는데, 필자는 이 말이 영 요령부득하다.
실질적으로 역사의 기록을 스윽 훑어보면 바로 영토의 분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편하게 말하자면 땅따먹기가 역사 그 자체였다. 물론 이러한 땅따먹기가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되면서 인간존중에 대한 사고가 깊어지며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종족과 신앙 등의 많은 이유로 인간에게 영원히 불식될 희망은 ‘없다’고도 단정할 수 있다.
우리 종족과 서토인 대륙에 사는 민중은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이다. (이 주제는 뒷날 엄청 길게 다룰 것이다.) 중공의 대학교수가 ‘순수한 혈통의 한족(漢族)은 없다’고 발표한 바도 있지만, 유전학으로도 동아시아인은 거의 유전적으로 약간의 차이밖에 없음은 이미 증명되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서토에서도 특히 북쪽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살 수도 있지만, 소위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다수라고 한다.
주; 감숙성 란주 생명과학학원 謝小東교수 2007년 2월 발표
중공에는 자기 역사가 있을까
동아시아인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거짓이 있다. 과장되게 말하여 중공(소위 중국)의 역사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 역사의 국가는 고대로부터 혈연적인 일관성이 없다.
하(夏)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가 아직 불분명하고, 상(商)나라는 명백하게 동이족이며, 주(周)나라는 상(商)의 지방정권이 중앙정권을 뒤집고 세운 국가라 상(商)나라와 그다지 혈통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개국에 가장 큰 공헌하였다는 이윤이 동이족이다. 진시황은 성이 영(嬴)인데, 그 조상인 동이의 한 갈래가 서쪽으로 이주하였음을 유명한 사학자인 부사년이 주장하였고, 이제는 상식이 되고 있다.
한나라 유방? 출신지가 강소성 서주 패현인데 볼 것도 없이 동이의 밀집지역이었던 현 산동성의 변방 사람일 뿐이다. 수와 당으로 이어 내려가는 탁발씨 북위는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돌궐의 한 갈래. 수와 당의 선조는 선비라고도 말한다. 고구리의 연방이었다가 떨어져 나간 갈래로도 추정할 수 있다.
보통 순수한 중국인의 나라를 들 때 한, 송, 명을 들지만, 송 태조 조광윤의 출신지가 하북성이라면 일단 한나라 계통일까조차 의심된다. 필자와 그 동료들의 주장대로라면 남경이 신라와 고리로 이어지는 영역이라 명나라 주원장도 소위 한족(漢族)이라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수와 당은 확실하게 돌궐(선비) 계통이고, 거란의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불 보듯 뻔한 소위 만리장성 바깥 사람들이니 한족의 정의(定義?)와 인연이 없다. 더욱이 사서에서 쓰여 있듯 요와 금의 황가는 신라계이면서 고리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고, 청나라는 후금이라 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무슨 한족의 역사가 있다고 하겠는가?
원나라가 소위 중국의 역사다? 만약 그렇다면,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백 년 동안 받았다고, 영국의 역사를 인도의 역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스갯소리도 못되는 억지임에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서토와 우리의 최대 분쟁 지역인 요, 요동
땅에는 기억이 담겨 있다. 그보다 앞서 지명이 만들어지는 데는 그 지역의 유래, 즉 역사가 가장 우선시된다. 그러면서도 권력자에 의하여 너무도 쉽게 지명은 바뀌기도 한다. 요(遼)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지명에는 약점이 하나 존재한다. 그 땅을 빼앗긴 사람의 기억에서 매우 빨리 사라진다.
그 요는 시대적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돌고 돌아 다시 ‘요’가 되어 이천 년 이상 유지되었던 지명이고, 서토와 우리를 가르는 요충지였다.
주: 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서토를 잃었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상징적 예가 김부식의 삼국사인데, 권37 지리지 4권에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미상한 곳”이라며 삼백여 곳을 기록하였다. 삼백여 곳을 김부식은 모른다고 하였으나, 현재 지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으리는 꽤 많이 찾을 수 있다. 즉 이 땅에는 없지만, 서토에는 수도 없이 남아 있다.
그런 역사 깊은 ‘요’가 지금은 ‘좌권(左權)’으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서토가 공산화된 이래 왕래를 못하게 되니 그 지명에 관심을 잃게 되어, 아무리 중요한 지명이지만, 사학자들 눈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것을 리(黎)민족사연구회 오재성선생이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를 1989년도에 발행하면서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왜 ‘좌권’이 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7, 8년 전쯤 필자가 중공의 포탈인 百度(바이두)를 뒤적거리다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주: 중공은 일본인과 전쟁하기보다 오히려 그들과 손잡다시피 하고 국민당과 전쟁에 열중하였다. 때문에 몇 안 되는 ‘요’에서 1942년 5월 항일전쟁 승리는 그들에게 매우 귀한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 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 좌권(원 이름은 左紀權)인데, 그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해 9월 요(遼)라는 지명을 ‘좌권현’으로 고쳤으니 교류가 끊어졌던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요동과 요서의 경계가 바로 遼였구나!
요(遼)의 위치를 알게 되니 요동과 요서의 구분을 알게 되고, 조감적으로 사서를 검토하면 요하의 동쪽으로 요동을 옮긴 일이 늦어도 명나라 때일 수 있다고 추정되면서, 거시적인 우리나라 영토의 변천, 즉 우리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遼의 위치에 관한 지식으로 혁명적인 사고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야기를 돌려서 지명이 기록되는 지도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보겠다.
보물이 많다는 저 서토에 고대 지도는 왜 조잡할까?
그들에게 가장 오래된 지도로 공인된 지도는 송 때 작성되었다는 우적도이다. 그 우적도와 이름이 같은 지도는 꽤 많으나, 이 기사에 소개하는 지도는 돌에 새겨진 지도를 선명화 작업으로 잘 보이게 만든 지도이다.
고대지도라고 하기에는 겸연쩍지만 역사연구가들이 즐겨보는 지도가 대청광여도이다. 이 기사 앞에 소개한 지도이다. 왜곡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 신뢰성이 의심되고 있으나, 도움되는 내용도 많아 즐겨 인용된다.
다른 유명한 지도를 꼽자면 소식(소동파로 유명한 시인)이 만들었다는 송본지리지장도를 뺄 수 없다. (소식의 제작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는 하다.) 앞의 오재성선생과 필자와 같은 동조자들이 역사(영역) 왜곡의 표본으로 비판하는 44편의 지도이다. 비판의 첫째 표적은 우선 44편이나 되는 어느 지도에도 현재의 대만을 그리지 못하였다. 즉 소식은 대륙의 동쪽을 차지하였던, 고구리, 백제, 신라 삼국의 동이 계열 나라들의 영역을 모른 채 대륙 전역을 소위 중국의 영역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이 전통은 오늘날도 담기양이라는 학자의 ‘중국역사지도집’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두 번째로는 같은 지역임에도 지명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는 사실이다. 통치자의 지시로 지역명이 수시로 변화되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조잡하다는 식견을 버릴 수 없다.

이러한 조잡하고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지도라 하더라도 요(遼)는 이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존재하였고, 동양의 지식인은 그 사실에 눈을 감고 역사를 제대로 탐구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요(遼)와 같은 중요한 역사 현장의 지명 변경과 제대로 그려진 지도의 부재로 역사연구가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다루었다.
다음에는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요하’일 수 없고, ‘요’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우리의 정체성에 혁명을 몰고 올 올바른 역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