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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에베소서 2:11-22 강해: 그리스도의 피가 허문 막힌 담과 만민이 기도하는 집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2 11-22 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허물어진 분리의 담과 진정한 화해의 의미를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을 넘어,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 차별 없는 공동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대학생 수준의 신학적 통찰로 풀어냅니다. 십자가가 이룬 새로운 평화와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론을 조명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강해를 따라 에베소서 2 11–22절을 천천히 더듬어가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무엇을 무너뜨렸고 무엇을 새롭게 세웠는지에 대해 놀랄 만큼 구체적인 풍경을 보게 된다. 바울은 먼저생각하라는 단호한 명령으로 청중을 붙잡는다. 이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구원 이전의 실존을 현재의 자아와 정면으로 대질시키는 영적 훈련이다.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사망했던 과거가 떠오르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함께 앉히신 자리가 은혜와 자비로만 설명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시작점이 곧 교회론의 토대를 놓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구원 체험이 에베소서 1 10절의 거대한 비전,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경륜과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바로 이 통일의 구체적 구현이며, 분열과 적대의 역사를 뒤집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다.


그 통일이 왜 필요한지 바울은 에베소의 과거를 통해 적시한다. 그때 너희는 육체로 이방인이었고, 손으로 행한 할례를 기준으로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었으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결국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말은 단순한 민족적 명칭이 아니라 존재론적 고립을 가리킨다. 성전의 구조 자체가 분리의 질서를 시각화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제사장의 뜰이 층층이 나뉘었고, 경계에는 접근 금지의 문구가 걸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드로비모 사건은 오해 하나가 얼마나 쉽게 폭동과 살기를 부르는지 보여 준다. 마태복음의 한 에피소드 속 가나안 여인의 절박한 말 또한 당시 이방인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의 공기를 반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이 단지 물리적 차단벽이 아니라, 혐오와 자기의로 강화된 종교적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짚는다. 언약은 본래 축복의 통로를 세계로 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인간은 그 선택을 배타의 논리로 바꿔 버렸다. 문제는 성전 밖의 세상이 아니라 성전 안, 곧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내부에서 담이 자라났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결정을 선언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가까워졌다는 말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신분의 전환, 관계의 회복, 존재론의 변화를 뜻한다. 무엇이 그 변화를 가능케 했는가. 14절은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한다. 예수는 평화를 중재하는 분이기 전에 평화 그 자체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발견한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 , 명예가 무력해지는 공간이며, 그 모든 차이가 상징적 자본으로 작동하지 않는 장소다. 누구든 주 앞에서는 동일한 시민이고 하나님의 권속이다. 어느 목회자의 회고처럼, 사회에서는 비범해 보이는 이들도 교회에서는 그저 평범한 성도로 서게 된다. 이 평범함이야말로 막힌 담이 허물어진 자리에서만 가능한 복음의 공기다. 교회에서높은 자리가 의미를 잃는 이유는 예수의 피가 이미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15절은 담의 실체를 밝힌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 예수의 육체로 폐해졌다. 장재형목사는 율법의 이중성을 명료하게 구분한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지만, 죄 아래 갇힌 인간에게 율법은 지켜야 할 명령에서 벗어나 타인을 판단하는 자원으로 변질되기 쉽다. 율법이 만들어 내는 평화는 질서의 평화, 즉 경계와 구획을 유지함으로써 보장되는 안정이다. 반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사랑의 평화로, 경계를 넘어 타인의 짐을 함께 지며 화해를 감수하는 용기의 이름이다. 예수는 율법의 요구를 그분의 삶과 죽음으로 온전히 이루시고, 정죄의 채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자유로 초대하셨다. 이를 통해한 새 사람이 창조되었다. 새 사람은 타자를 포함할 수 있는 자아이고, 화해를 삶의 기본 문법으로 삼는 공동체적 인간형이다.


이 새로움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16절은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선언한다. 여기에는 수직적 화해와 수평적 화해가 동시에 놓여 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사람들 사이의 적대도 근거를 잃는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는 자가 되는 것, 화해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화해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주기도문은 이 윤리를 매일의 호흡으로 끌고 들어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장재형목사는 십자가의 영성은 혐오의 언어를 낯설어하게 만들며, 분리의 습관을 유쾌하게 무력화한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신앙의 언어를 말하는 공동체가 인종, 계층, 성별, 세대, 국적의 벽 앞에서 주저앉아 온 역사를 돌아보면, 십자가가 녹여야 할 철조망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평화의 실험실이어야 한다. 칼과 창이 낫과 보습으로 변하는 이사야의 비전은, 회의실의 합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17절과 18절은 이 평화가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보여 준다. 오신 주님은 먼 데 있는 이방인에게도,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에게도 평안을 전하셨고, 이제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 장재형목사는 오순절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성령은 특정 계층이나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육체 위에 임하셨다. 은사와 직분은 다양하지만, 접근 권한은 동일하다. 교회의 가장 깊은 민주주의는 여기서 나온다. 누구나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우월감은 언제나 불법이며, 배제의 욕망은 언제나 이방적이다. 성령께서 부으신 평안은 경쟁을 낮추고, 비교를 중지시키며, 관계의 최단거리를 열어 준다.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계신다.


그래서 19절은 새로운 정체성을 선포한다. 이제 너희는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다. 장재형목사는 시민권과 가족이라는 이중의 비유가 교회의 내부 질서를 규정한다고 본다. 시민은 권리와 책임을 공유하고, 가족은 사랑과 돌봄을 공유한다. 시민권이 법적 평등을 보장한다면, 권속은 정서적 환대를 보장한다. 이 둘이 결합될 때 교회론은 관념이 아니라 살붙은 문화가 된다. 이어지는 20절은 기초를 밝힌다.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신다. 모퉁이돌 예수는 두 벽을 연결하고 전체 구조의 각도를 잡는다. 사도적 복음과 선지자적 말씀이라는 터가 수평과 수직을 붙들고, 그 위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의 사람들이 한 건물로 맞물려 간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의 권위가 오직 말씀과 복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카리스마의 매력이나 제도의 편의가 아니라, 모퉁이돌이신 예수의 각도에서만 교회는 곧게 선다. 복음에서 한 치라도 비껴서면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비틀리기 시작한다.


21절과 22절은 교회를 정적 대상이 아닌 동적 과정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교회는 완성된 기념비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건축 현장이다. 신자는 벽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이며, 서로 맞물려 갈수록 강화되는 유기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제3성전 담론을 교회론 속에 위치시킨다. 예수의 몸 된 교회가 바로 성전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교회는 차별과 혐오를 해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공의 치유소여야 한다. “만민이라는 단어는 교회의 사명을 해석하는 열쇠다. 만민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 이주노동자, 유학생, 난민, 노인과 아동, 장애를 가진 이웃, 경제적 취약계층,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서로 다른 형제자매까지 포함한다. 교회가 만민의 집이라면, 그 문턱은 낮아야 하고, 언어는 환대의 억양을 가져야 하며, 자리 배치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동선이어야 한다. 예배 후 식탁에서 누구와 나란히 앉는가, 기도 제목을 나눌 때 누구의 침묵을 먼저 들어 주는가, 새가족에게 어떤 눈빛을 건네는가 같은 작은 습관들이 막힌 담을 허시는 주님의 일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이 관점에서 오늘의 한국교회와 세계의 교회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선, 신학은 설교의 수사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질서로 구현되어야 한다. 에베소서의 교회론은 평등을 약속하는 선언문이 아니라, 차별을 해체하는 운영 매뉴얼이다. 직분과 리더십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모퉁이돌 예수의 각도에 맞춰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율법의 질서가 주는 평화를 사랑의 평화로 변환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규정과 절차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위한 것인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지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랑의 평화는 규정을 무력화하지 않고, 그 목적을 완성한다. 잃어버린 한 사람을 위하여 아흔아홉을 들판에 두고 찾으러 가는 길에서, 공동체의 진짜 안전은 오히려 강화된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 안에서 교회는 갈등의 중재자가 아니라 평화 자체라는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갈등을 잠시 얼려 두는 타협이 아니라,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시키는 화해를 목표로 삼을 때, 교회의 언어는 분열의 시대에 설득력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설교가 사회 속에서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그리스도의 피가 놓여 있다. 피는 죄를 사하는 대속의 표지이자, 공동체를 묶는 언약의 표지이며, 담을 무너뜨리는 평화의 근거다. 피를 잊은 교회는 쉽게 경계 짓기의 습관으로 돌아가고, 피를 기억하는 교회는 언제나 화해의 모험을 시작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피의 신학을 삶의 문법으로 번역해 낸다. 용서를 말할 때 값싼 관용을 경계하고, 정의를 말할 때 복수의 충동을 경계한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 상대는 잠재적 형제자매이며, 이미 은혜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고,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다. 세상은 경쟁을 통해 확장되지만, 교회는 환대를 통해 깊어진다. 세상은 장벽으로 안전을 확보하지만, 교회는 담을 헐어 평화를 확보한다. 그 길의 모퉁이에서 각도를 잡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곧 모퉁이돌 예수다.


결국 에베소서 2 11–22절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통해 미래의 사명을 분명히 한다. 너희는 외인도 손도 아니다. 너희는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다.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서 있으며,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 각자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강해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은 이 단정한 문장들에 생생한 체온을 불어넣는 통찰이다. 그 통찰은 신학의 언어를 삶의 습관으로, 교리의 명제를 공동체의 문화로, 설교의 문장을 도시의 일상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우리 안의 담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담을 안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그 담을 허물고 새 사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의 답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피다.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었고, 서로에게 가까이 이끌었고, 마침내 만민이 기도하는 집차별 없는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 화해의 공동체로 우리를 세워 간다. 이것이 교회론의 심장이고, 오늘의 교회가 다시 세상 앞에서 증언해야 할 복음의 얼굴이다. 그리고 바로 그 얼굴을, 장재형목사는 성경 본문에 충실한 강해를 통해 대학생 수준의 신학적 언어로 또렷하게 그려 보인다. 에베소서 2장의 울림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될지 모른다.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성전으로 지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davidjang.org
작성 2025.10.13 17:44 수정 2025.10.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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