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에베소서 5장 강해에 대한 심층 분석. 이 글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의 법리적 완결성과 성도의 윤리적 삶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탐구합니다. 구원론적 은혜가 어떻게 성화의 삶으로 체화되는지에 대한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을 대학생 수준의 어휘와 유기적
논리로 풀어내어, 교리와 실천이 통합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제시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에베소서 5장 강해는 구원의 진리가 윤리로 열매 맺는
그 필연성을 정교하게 드러내며,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사도의 권면을 신학과 실천의 두 차원에서 동시에 해명한다. 그는
먼저 ‘본받음’이 피상적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를 뜻한다고
밝힌다.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가라는 역설은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신분 안에서 풀린다. 자녀됨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의 선언이며,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 성령의 내주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능동적으로 이끄는 구원의 질서다. 그래서 본받음의 구체적 경로는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 가운데 행하라”는 명령은, 추상적
신성을 흉내 내는 도덕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을 삶으로 따라가는 길이 하나님 닮음의 실제라는 사실을 못박는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신론과 기독론의 구조적 관계를 분명히 한다. 일반
계시—이성과 양심, 피조 세계의 질서—는 창조주의 실재와 영광을 암시하지만, 하나님의 인격과 의지, 우리를 향한 구체적 사랑의 내용을 알려주는 데에는 본질적 한계를 지닌다. 헬라
철학은 존재론적 신을 논증하는 데 탁월했으나, 그 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곧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특별 계시를 통해서만 열린다. 그리스도라는 계시의 프리즘을 통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 만남으로 배우며, 그 만남이 우리 존재의 중심을
재구성한다. 장재형 신학에서 ‘하나님 본받기’는 바로 이 그리스도론적 인식이 윤리적 실천으로 변주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5장 2절은 핵심을 찌른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표현을 ‘대속’의 법리로 해명한다. 죄는 단지 감정적 유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발생한 객관적 채무이며, 공의는 그 채무의 정당한 상환을 요구한다. 구약의 제사는 이 원리의 예표였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죄를 잠정적으로
가릴 뿐 죄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는 실체로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그 제사는 하나님께 ‘향기’로 상달되었다. 여기서 ‘속량’은 핵심 개념이다. 속량은 값을 지불해 노예를 해방하는 법적 행위이며,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해 죄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사서 해방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정서적 위로가 아니라 합법적 대속에 기초한 실재이며, 그
효력은 어떤 고발로도 취소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아들을
내어주심”을 강조할 때, 성부 안의 고통과 사랑의 변증법도
동시에 드러난다. 십자가는 성부의 내어줌과 성자의 순종이 만난 절정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교리와 윤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신학적 도식이 확립된다.
이 법적 완결성 위에서 장재형 목사는 성화의 삶이 선택이 아니라 필연임을 논증한다. 에베소서 5장 3절 이하에
나열되는 음행, 더러움, 탐욕은 단순한 개인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값을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거룩을 모독하는 정체성의 배반이다.
그는 당시 에베소 사회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을 환기한다.
풍요와 성적 일탈이 신성화되던 토양에서, 성도는 단지 금욕주의로 어둠을 피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질서를 드러내는 ‘새 사람’의 공동체여야 했다. 탐욕을 우상숭배라 규정하는 바울의 언어는, 하나님 아닌 피조물을
궁극 가치로 올려세우는 모든 삶의 구조가 곧 우상 숭배라는 통찰을 반영한다. 로마서 1장이 말하듯, 창조주를 경배하기를 거부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역리(逆理)의 삶—자기중심적
욕망이 질서를 전도하는 삶—에 빠진다. 반대로 구원받은 자는
생명의 순리를 따른다. 거룩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회복이며,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실현되는 참된 인간성의 개화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선언은 기독교 정체성의 대전환을 압축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는 명령과
‘빛의 열매’—착함, 의로움, 진실함—을 연결해 설명한다. 착함은
타자의 선익을 추구하는 사랑의 의지, 의로움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질서를 세우는 공적 정의, 진실함은 말과 삶이 일치하는 투명성이다. 이 열매는 성령의 내주와
공동체의 상호 돌봄 속에서 자란다. 따라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요구는 도덕적 힐난이 아니라 삶 자체의 광휘로 어둠을 드러내는 증언의
행위다.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질 수 없듯,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빛으로 존재하며, 그 선함과 공의와 진실이 어둠의 구조를 해체한다. 장재형
목사는 ‘책망’을 공적 책임으로 해석한다. 곧,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사회·문화·경제의 영역에 스며드는 윤리적 파급력을 갖는다.
5장 14절의 “잠자는 자여 깨어라”는 고대 교회의 세례 찬가를 연상시키는 구절로, 성도의 각성을 촉구한다. 깨어남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각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실 때, 우리는 단지 잘못을 수정하는 차원을 넘어, 삶의 방향과 사랑의 질서를 새롭게 배치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권면은 ‘시간’이라는 자원을 신학적으로 재구성한다. “세월을 아끼라”—카이로스를 붙잡으라는 이 요청은 바쁜 삶이 아니라
의미 있게 배치된 시간을 지향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자신의 일상, 노동, 관계, 쉼을 복음의
질서 안에 재편한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주님의 뜻’이 추상적 해답지가 아니라, 공동체와 소명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성령이
열어 가시는 동행의 길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분별은 은밀한 영감을 기다리는 수동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공동체적 검증과 순종이라는 능동적 과정이다.
그 흐름에서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대조가 선명해진다. 성령 충만은
일회적 체험이 아니라 계속적 명령이며, 그 표지는 공동체적 예배와 일상의 감사, 상호 복종으로 나타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말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항상 감사하고’ ‘서로 복종하라’는
연속된 분사는 성령 충만의 실천적 모양을 보여준다. 여기서 감사는 현실 도피적 낙관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이 이미 우리 존재의 심연을 뒤집었다는 신앙고백의 습관화다. 그리고 ‘서로 복종’은 권위의 폐지가 아니라 권위의 성화—그리스도의 자기비움(케노시스)을
닮아 낮아짐으로 세우는 권위—을 뜻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교회론과 가정 윤리의 관문으로 읽는다. 곧,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수직적 지배가 아니라 상호 섬김의 질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낸다.
이 관문을 지나 바울은 가정 규범으로 들어가며,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에 비추어 해석한다. 장재형 목사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구절에서
기독론적 윤리의 정수를 본다. 남편의 권위는 통제의 권리가 아니라 성화로 이끄는 봉사의 책임이며, 그 형식은 ‘자기희생’이다. 아내의 존중과 협력 역시 주께 하듯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응답으로, 억압적
순응이 아니라 상호성 안에서 완성된다. 이 신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언약을 비추는 표지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이 본문을 폭력의 근거로 오용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권력관계를 전도시킨다고 말한다. 주께서 머리이시기에, 모든
권위는 섬김으로 재정의되고, 모든 복종은 존엄을 세우는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부부의 상호성은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관계로 확장되며,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다층적으로 증언한다.
이처럼 에베소서 5장의 흐름을 따라가면,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왜 ‘교리-윤리
통합’의 대표적 모델로 평가되는지 분명해진다. 그는 대속의
법리—공의를 만족시킨 합법적 속량—와 성화의 윤리—빛의 열매, 지혜로운 시간의 배치,
성령 충만의 습관—를 하나의 유기체적 생명으로 엮어낸다.
여기에는 단단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의 잠재력이나 문화의 진보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시작된 새 창조에 대한 소망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윤리는 자기계발이나 도덕적 완벽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로 시작된 삶이 은혜의 능력 안에서, 교회라는 몸을 통해, 세상
속에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여정이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의 일터, 집안의
사소한 말투와 사회적 결정, 소비와 여가까지 모든 영역이 하나님 본받기의 장이 된다. 이 총체성은 신앙을 사적·내면적 영역에 가두려는 세속적 압박에 대한
저항이며, 동시에 기독교 윤리가 공적 선을 낳는 창조적 동력이 됨을 증언한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이
우리를 자녀로 세우셨다면,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그 길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일상적 걸음이며, 우상을 거절하고 빛의
열매를 맺는 구체적 선택이며, 시간을 지혜롭게 배치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구하는 지속적 훈련이며,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상호 섬김으로 권위를 성화하는 공적 증언이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중심축은 변치 않는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대속의 향기가 우리 안에 스며들 때, 우리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고, 교회는 산 위의 동네처럼 빛나 세상의 어둠을 드러낸다. 그래서 하나님 본받기는 결코 인간의 강박이 아니다. 그것은 대속의
은혜가 열어 준 자유의 길이며, 성령께서 동행하시는 기쁨의 길이고, 장차
도래할 충만 속에서 이미 지금 여기서 맛보는 새 창조의 삶이다. 구원은 교리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은 반드시 삶이 된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을 통해 울리는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호소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신실한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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