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디모데후서 3장 강해를 바탕으로 바울과 디모데의 사제 관계, 말씀과 행실의 일치, 성경의 영감과 교육적 유익, 가정 신앙교육과 암송 훈련의 실제까지 균형 있게 해설한 신학적 에세이.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전한 디모데후서 3장(10–17절)에 대한 설교는 사랑과 진리로 엮인 사제 관계의 전범을 오늘의 목회 현장에 정교하게 비추어 준다. 바울이 마지막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는 유언 같은 호흡으로 이어지지만,
체념이 아니라 생명의 단단한 줄기를 관통하는 권면으로 가득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텍스트를
따라 “말씀과 삶, 목표와 믿음, 참을성과 사랑, 그리고 인내”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임을 강조한다. 복음은 지식의 표제가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며, 그래서 바울은 “내 가르침과 생활”을
나란히 둔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고백처럼 예수는 “말과
행실에 능하신” 분이셨고(눅 24:19), 그 제자 바울 또한 복음의 진리를 말로 설파했을 뿐 아니라 삶으로 입증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복음의 핵심이 윤리의 장식이 아니라 실존의 프레임임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칠십 문도를 세워 사랑으로 길렀듯, 바울도
로마서 16장에 펼쳐진 넓은 동역의 지평 속에서 아름다운 휴먼 네트워크를 일구었다. 동역은 성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의 과실이다. 사랑과
진리가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면 인간관계는 기능적 결탁이 아니라 은혜의 연대로 견고해진다. 디모데후서는
바로 이 은혜의 연대가 마지막 밤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독자에게 “여러분은 이런 제자를 가지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누군가를 소유하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적 관계를 세우는
책임을 묻는 소명이다. 목회의 최전선에서 전도하고 수고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동역의 사람들을 찾아
일으키기 위함이라는 점에서다.
본문은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목표와 믿음, 참을성과 사랑, 인내를
본받아 살아왔다”(딤후 3:10, 공동번역)로 시작한다. 바울의 어휘 배치는 우연이 아니다. 가르침은 생활로, 목표는 믿음으로,
참을성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목표 없는 믿음은 열정의 소모에 불과하고, 사랑 없는 인내는 냉혹한 지구력일 뿐이다. 바울은 “향방 없는 달음질”을 경계하며(고전 9:26) 목표 지향적 믿음으로 삶을 재배열했다. 달리기와 권투는
고대 경기장의 화려한 무대였지만 바울에게 그 이미지는 훈련된 절제, 명확한 표적, 마침내 승리의 관을 가리키는 비유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목표가
무엇이냐를 묻지 않고 목표가 누구이신가를 묻는다. 목표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인격적 중심이며, 믿음은 그 목표와의 관계를 끝까지 붙드는 근력이다.
사랑과 참을성의 결합은 박해의 현장에서 빛난다. 바울은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겪은 박해를 상기시키며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다”고 고백한다(딤후 3:11).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은 것처럼 버려졌지만(행 14:19–20) 그는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의 제자였고(행 16:1–3) 젊은 시절부터 이런 이야기를 가까이서 보거나 들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의 기억이 고통을 오래 붙드는 습성에 주목한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 고난을 회상하며 그것이 절망의
잔흔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증거였다고, 디모데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조용히 되묻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는다”(딤후 3:12)는 선언은 낭만적 헌신을 견고한 각오로 바꾸는 문장이다. 경건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직면이며, 사랑은 고난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길에서 더 밝아진다.
세상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로 가득하고 그들은 더욱 악해져 사람을 속이고 스스로도 속는다(딤후 3:13). 이 현실 인식 앞에서 바울의 처방은 단순하지만 결정적이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라”(딤후 3:14). 신앙은 결코 추상적 사유의
체계로만 전승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얼굴과 이름, 이야기와 눈물 속에서 전해진다. 디모데의 신앙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가정교육에서 시작되었다(딤후 1:5).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현대의 가정에 연결한다. 신앙교육은 급한 시험공부처럼 몰아치기식으로 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성경이 ‘늘 옆에 있는 책’이 될 때, 말씀은 자녀의 상상력과 도덕감각, 선택의 기준 깊숙이 뿌리내린다. 디지털 화면이 모든 메시지를 쏟아내는
시대일수록 성경이라는 ‘경(經)’을 사랑하는 습속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습속은 부모의 낮고
느린 목소리, 반복되는 낭독, 삶 속 작은 실천에서 자란다.
“어려서부터 거룩한 글들을 알았나니,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한다”(딤후 3:15). 여기서 디모데가 알았던 ‘성경’은 지금 우리가 가진 신구약 전권이 아니라 당시 유대 공동체가
경전으로 받아들인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섬세히 첨삭한다. 흔히 “에베소에서 지금의 성경이 편찬되었다”는 식의 단정이 회자되지만, 실제로 신약 정경은 여러 지역 교회가
사도적 전승을 보존하고 서신을 순환·검증하는 과정 속에서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다.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교회들이 중요한 허브였음은 분명하나, 정경의
확정은 교회 전체의 오랜 분별의 결실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책과 특히 가죽 종이에 쓴 것들”을 가져오라는 당부(딤후 4:13)는 당시 문서 문화의 현장감을 전한다. 말씀은 공중에서 떨어진 신비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 아래 역사 속
사람들이 읽고 쓰고 보존하고 전수한 은총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성경 본문 전승의 신뢰성에 관해서도 장재형목사는 흔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사해문서의
발견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성경과 완전히 동일했다”는
통쾌한 확증처럼 소개되곤 하지만, 보다 정확한 서술은 이렇다. 사해문서, 특히 이사야 두루마리 같은 중요 사본은 현행 마소라 본문과 큰 틀에서 놀랍도록 일치하면서도, 필사 전승 특유의 사소한 차이와 변이도 함께 보여준다. 바로 그
지점이 역설적으로 성경 본문 전승의 신뢰성을 강화한다. 수천 년의 시간과 여러 공동체의 손을 거치면서도
핵심 메시지가 얼마나 정교하게 보존되어 왔는지 학문적으로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을 인간의 손길만으로
환원하는 태도도, 반대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신비화하는 태도도 편향이다. 장재형목사의 강조처럼 교회는 성령의 감동(theopneustos) 아래
기록되고 전해진 말씀을 하나님의 권위로 받아들이되, 동시에 그 말씀을 사랑하는 학문적 성실성으로 섬겨야
한다.
결국 핵심은 이 문장에 응축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교훈은 복음의 틀을 제공한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오를 수 없는 계단을 제시하는
교양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구원의 길을 증언하는 계시서다.
그래서 복음의 교훈은 삶을 옭아매는 규범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는 진리다. 교훈만 있고 책망이
없다면 신앙은 윤리적 자기만족으로 흐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죄를 가차 없이 찌르고 드러낸다. 그 책망이 우리를 부끄럽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로 이끈다. 인간의 행위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꺼내는 힘이 믿음으로 받는 은혜에 있음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뜨겁게 증언했다. 책망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의
시작이며,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길이다.
바르게 함은 왜곡된 욕망과 비뚤어진 판단을 곧추세운다. 건강(健康)이란 글자의 뜻처럼, 바로
서는 것이 곧 건강이다. 성경은 사람을 납작한 효율의 도구로 만들지 않고 인격으로 세운다. 왜냐하면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이다(히 4:12). 성경의 통찰은 우리의 내면을 정확히
겨냥하고, 그 겨냥은 우리를 무력화하려는 공격이 아니라 정밀한 수술의 칼처럼 생명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의로 교육하기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 앞에 올곧게 서는 법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의는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웃과의 관계도 새로워진다. 그러니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성경은 “완벽한 교육서”다.
인간을 참되게 가르치고, 때로는 엄하게 꾸짖고, 왜곡을
바로잡고, 의의 길로 훈련하여 마침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한다.
따라서 결론은 자연스럽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성경은
단지 ‘옳은 말’을 더 많이 알게 하는 책이 아니라, 선을 행할 실제적 능력을 부어 주는 책이다. 여기서 능력은 의지력의
강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은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꾸고, 욕망을 재구성하며, 습관을 거룩하게 재배열한다. 결국 선의 지속 가능성은 올바른 해석과 새로워진 욕망에서 나온다. 그래서
말씀 묵상과 암송은 신비적 몰입이 아니라 훈련된 사랑의 기술이다. 어떤 선교단체들이 젊은 날 매일 몇
구절씩 암송하게 했다는 간증은 단순한 억지 훈련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의 암송은 말씀을 기억의 표면에만
남겨 두지 않고,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침윤시킨다. 오래
묵힌 말씀이 순간의 유혹과 분노, 두려움의 파도 앞에서 자동화된 반응을 새롭게 만든다. 이런 자동화가 바로 ‘훈련된 자유’다.
현대의 자녀교육도 같은 원리가 통한다. 아이들이 세상에 물들기 전에, 아니 이미 물든 그 자리에서라도, 성경을 삶의 공기처럼 익히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부모의 권위로 강제하자는 말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말씀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식탁 위에 펼쳐진 성경, 하루를 열고 닫는 짧은 낭독, 산책길에 외워 보는 한 구절, 갈등의 순간 말씀으로 감정을 정리하는 태도, 실패했을 때 감사와
회개로 다시 일어나는 모습. 이런 장면들이 아이의 마음속에 ‘신앙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로 기록된다. 에베소서의 전신갑주
비유는 이 모든 과정을 상징적으로 요약한다. 진리의 허리띠로 생각을 묶고, 의의 흉배로 마음을 보호하며, 복음의 신으로 관계의 길을 준비하고, 믿음의 방패로 거짓의 화살을 막고, 구원의 투구로 정체성을 지키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한다(엡 6:13–17). 갑주는 전시 때만 입는 옷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이다.
목회는 본질적으로 제자도를 회복하는 일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마지막 권면을 오늘의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열어 준다. 우리가 찾는 제자는 거창한 프로젝트로 발굴되는
인재가 아니라, 말씀과 삶이 닮아가는 작은 순종 속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졌는가?” 동시에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목회 현장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설교는 주간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세우는 장기적 언약이다. 교육은 시험 대비가 아니라 구원으로 이끄는 지혜를 일깨우는 예술이다. 공동체는
유능한 인력의 모음이 아니라 복음으로 엮인 가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꾸준함에서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문장 몇 곳을 신중히 손본다. 디모데의 나이를 십대 중반으로 특정하기보다 “젊은 연령대”로 보는 것이 역사적 신중함에 맞다. 또한 신약 정경의 형성에 관해 “어떤 지역에서 편찬되었다”는 단정은 피하고, “교회 전체가 사도적 전승을 분별하는 오랜 과정 속에서 확립되었다”는
기술이 더 정확하다. 사해문서를 두고 “모두 똑같았다”는 표현보다는 “핵심 메시지는 놀라울 만큼 일치하며 부분적 변이는
본문 전승의 신뢰성을 오히려 입증한다”는 설명이 적합하다. 이런
첨삭은 설교의 신학적 방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학문적 정밀도를 높여 준다. 장재형목사의 본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의 권위를 도그마로만
호소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그 권위가 어떻게 보존되고 확인되어 왔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권위가 오늘 우리의 생각과 습관과 사랑을 어떻게 빚어 가는지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디모데후서 3장은 마지막 교훈이자 마지막 명령이며, 동시에 영원한 약속이다. 경건을 향한 길은 결코 넓지 않다. 그러나 그 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바울과 디모데, 로이스와 유니게, 이름 없는 수많은 동역자들의 삶이 증언하듯, 말씀은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엮고 세대를 건넌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하여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라. 더 자주 펼치고 더 깊이 새기라. 배운 것에 거하고 확신한 것에 머물라. 그러면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선한 일을 감당할 능력을 날마다 새롭게 부어 줄 것이다. 바울의 마지막 문장처럼 담담하고 단호하게, 오늘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