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백리의 상징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영장산 자락에 있다. 부인 철원 최씨의 묘도 그 옆에 있다. 그런데 맹사성의 묘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맹사승의 무덤 옆에 흑기총(黑麒塚)이라는 검은 소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맹사성(孟思誠)은 황희(黃喜) 정승과 더불어 세종의 치세기를 열었던 조선 청백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맹사성은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연시조(聯時調)로 알려진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남긴 인물이다. 고불(古佛)이라는 그의 호는 “등이 구부정하다 하여 스스로 지었다”는 말도 있고, “불교식 제사를 지내며 아버지를 높여 부른 호칭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맹사성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창 맹씨(孟氏)이다. 그런데 충청도가 고향인 맹사성의 묘가 왜 경기도 광주에 있는 걸까? 맹사성이 세상을 떠난 후 시신을 본가인 온양으로 옮길 때, 상여가 잠깐 쉬는 동안에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명정(銘旌: 죽은 자의 관직명을 쓴 깃발)이 지금의 산소 자리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세종이 “그곳이 길지(吉地)이니 그곳에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그리고 사패지(賜牌紙)를 하사하여 맹사성의 묘를 쓰게 하였다. 그 후 그 일대에 신창 맹씨 후손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영장산은 맹산(孟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맹사성과 관련된 일화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일화는 소 무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봄날, 맹사성은 온양 본가 뒤 설화산(雪華山)에서 아이들이 주인없는 검은 소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아이들을 나무란 후 주인 없는 소를 데려와 정성껏 길렀다. 그리고는 그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서울과 온양을 오갔다고 한다. 그런 인연을 가졌던 검은 소는 맹사성이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사흘 동안 먹지 않고 울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맹사성이 “내가 타던 소를 내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말도 있지만 신창 맹씨 대종친회는 “그런 유언은 어떤 기록에도 없다”고 한다.
이처럼 충직하고 신기한 짐승의 죽음에 감동한 후손들은 맹사성의 묘 곁에 소를 묻고, 흑기총(黑麒塚)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소 무덤을 벌초하고, 술잔도 올린다고 한다. 그만큼 맹사성 묘와 흑기총(黑麒塚)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맹사성은 대사헌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고, 아버지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와 함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이름이 올라있을 정도로 효행의 모범이 되고 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서기1434년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왕명을 받아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三綱)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편찬한 언행록이자 교훈서이다.
맹사성은 그의 삶 자체가 청렴의 표본이었다. 정승임에도 남루한 옷차림을 고집했고, 집은 비가 새었으며, 먹거리는 관에서 주는 녹미(祿米: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했던 묵은 쌀)가 전부였다. 그의 청렴함은 보여주기 위한 단순한 검소함을 넘어 진정성이 배어 있는 삶이었다. 그랬던 맹사성은 얽힌 일화도 많다.
인침연(印沈淵)이라는 일화는 맹사성이 얼마나 청렴했던가를 알 수 있는 일화 중의 하나이다. 한번은 검은 소를 타고 하인도 없이 경기도 평택을 지날 때였다. 미리 맹정승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수령이 길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다는 정승 대신 볼품없는 한 노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맹정승의 길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고을 수령은 “비켜서라!”고 호통을 쳤다. 그렇게 호통을 치고 나서야 그가 바로 맹정승이었음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차고 있던 관인(官印)을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관인을 연못에 빠뜨렸다고 하여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고 한단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태종실록 편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맹사성은 우의정 때 태종실록 감수를 담당하는 감관사(監館事)를 맡았다. 당시 세종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치적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가 몹시도 궁금했다. 그래서 당시 감관사였던 맹사성을 찾아가 이런 부탁을 했다.
"내가 실록을 한번 보려고 하는데 되겠는가?"
맹사성은 일거에 거절하면서 임금을 부드럽게 꾸짖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하께서 만일 실록을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 고치려 할것이며, 사관(史館)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이에 세종이 “알겠다”며 돌아섰다고 한다.
이런 청렴한 조상을 두고 있는 우리가 어쩌다 죄명(罪名)이 수십개씩이나 되는 대통령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정말 한탄이 절로 나온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