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정년 퇴직한 선배가 반갑게도 안부 전화를 주었습니다.
집에서 쉬어보니 두어 달까지는 평소 못했던 것을 하면서 잘 보냈는데, 그 이후부터는 심심하고 시간이 더디 가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재취업을 해서 일하니 돈도 돈이지만 활기가 생기는 것 같다며,
저에게도 이런저런 자격증을 공부하면 퇴직 후 재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경험담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쉬다가 연초에 재취업한 직속 선배와는 저녁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섬세하지만 의리와 강단이 있어 퇴직 후에도 후배들이 많이 찾는 사람입니다.
그답게 1~2개월 만에 직장에서 신용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내심 부러웠습니다.
그는 퇴직 후 틈틈이 여행을 다니고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맘껏 책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업급여 지급이 종료되는 시기가 다가오자 ‘선뜻 나를 뽑아주는 곳이 없네’ 하는 현타가 오더니 조급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선배는 방긋 웃으며 희망섞인 격려도 잊지 않더군요.
“걱정마! 우리처럼 열심히 산 사람들은 밖에서도 통하더라고. 당신도 잘 될거야, 나처럼.”
두 선배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3년차 선배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2년 전에 저에게 인수인계하고 정년퇴직한 전임자 선배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분의 근황은 풍문으로 듣고 있었는데 막상 통화를 하니 풍문은 역시 소문에 불과하더군요.
선배는 퇴직 후 2년 6개월 동안 세 군데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잠깐 쉬고 있다고 했습니다.
안부를 주고받고 나서 전임자는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취업하려고 덤비면 일자리는 생기게 마련이니 너무 걱정마세요.
그런데 한 1~2년은 놀면서 푹 쉬면 좋겠어요. 있잖아요, 60살이 넘으니까 몸이 해마다 달라지더라구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활동적일 때 하고 싶은 일들을 체험하면 좋겠어요.”
퇴직자에게 직접 듣는 바깥(?) 소식은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이 체험했던 시간과 후배에게 해주는 말은 다르고 또 같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통점은 재취업에 성공했고, 일을 하면서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퇴직 전후에 찾아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지만 막상 부딪쳐보니까 별로 실체가 없는 감정이더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퇴직 후의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반응과 감정이 모두 달랐다는 것이지요.
퇴직을 앞둔 직장 동기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30여 년을 힘들게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에게 1~2년의 안식기간을 주겠다는 부류입니다.
이들의 계획은 가족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많아 감동적입니다.
둘째는 퇴직 후 가급적이면 빨리 재취업을 희망하는 부류입니다.
이들의 사정은 매우 다양한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거나 늦은 결혼으로 자녀가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경우,
그리고 자유시간에 대한 무료함과 불안감을 예방하려는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퇴직 후에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일을 내려놓고 전혀 다른 일을 계획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제각각이지만 말투와 행동이 싱싱해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퇴직한 선배와 퇴직을 목전에 둔 직장 동기들의 이야기를 사분사분 헤쳐보니 두 개의 키워드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돈’과 ‘시간’입니다.
돈과 시간이 X축 Y축을 이루고, 이들의 조합에 따라 생기는 무수한 좌표점마다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경제적 여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이러니하게 돈을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부자조차도 돈에 무지하여 불행한 부자로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돈은 근본적으로 교환 수단” 입니다.(주1)
그러기에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지만, 그 자체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돈으로 무엇을 교환할 것인가? 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퇴직준비도 돈, 노후준비도 돈, 퇴직하고 나서도 돈에 애면글면하면서
정작 교환의 최종목적물인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공부하고 사유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건의 용도와 품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구매하고 보려는 비합리적 소비자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많이 소비하고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또 다른 키워드는 ‘시간’입니다.
변화경영사상가이자 작가인 구본형은 “삶은 시간”이라고 일갈했습니다.(주2)
내게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이 곧 내 삶의 전부라는 뜻일 테지요.
그러면 내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퇴직을 앞둔 동기와 퇴직한 선배들 모두가 앞으로 주어질 ‘자유시간’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자유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지는 현상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콘텐츠가 빈약하고 충만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골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골프는 시간을 보내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재미도 있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골프에서 내면의 기쁨을 얻고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제일 현명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과 친밀한 사람은 타자에게도 친절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도 호의를 베푼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년과 직장인은 힘들고 바쁜 현실에 매몰되어 있어 본래의 ‘자기’와 교제하고 화해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것, 자기를 대면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자유시간을 딜리트(delete) 하려고 SNS에 과몰입하고 재취업을 서두르는 것이 아닐런지요?
자유는 원하지만 자유시간을 어색해 하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행동입니다.
제 주변의 실증사례를 통해 ‘퇴직 준비가 경제적 준비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것은 큰 소득입니다.
스트레칭을 했다고 운동을 마친 것이 아니듯 경제적 준비를 했다고 노후와 인생2막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살려고 어쩌지 못해 정해진 대로 살았다면, 이제라도 ‘나’에게 시간을 내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임종 환자들이 가장 후회하는 첫 번째가 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두 번째는 너무 일만 하고 살았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주3)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질문 앞에 설 것입니다.(주4)
“너, 충분히 살았니?”
“너, 충분히 사랑하고 왔니?”
주1. 시라이 사토시(오시연 옮김).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웅진지식하우스
주2.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을유문화사
주3. 백만기.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중앙일보. 2020.5.22.
주4. 김용규.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디플롯. 2025.5.
"평범한 일상을 덖어 환희를 짓고 싶은"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칼럼니스트 김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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