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가진 것은 왜 나를 아프게 하는가: 시기라는 영혼의 병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 자신과 타인을 올려놓는다. 어린 시절, 친구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장난감을 보며 가졌던 그 묘한 상실감. 학창 시절, 내 이름 위에 적힌 친구의 성적표를 보며 느꼈던 속쓰림. 어른이 되어, 동료의 승진 소식에 억지로 박수를 치고, 돌아서서 한숨을 내쉬는 '나'. 혹은, SNS 속에서 완벽해 보이는 누군가의 일상을 훔쳐보며, 내 삶의 빛깔이 초라하게 바래버리는 것 같은 그 순간의 공허함.
우리는 왜 이토록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 아프게 하는가? 남이 가진 것이 왜 나의 결핍이 되고, 타인의 행복이 왜 나의 불행처럼 느껴지는가? 이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라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 어두운 불길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태우고 있는가?
태초의 시선: 가인의 제물과 영혼의 독
이 감정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깊은 본성에 뿌리박힌, 태초부터 이어진 영혼의 병이다. 성경은 그 첫 번째 살인의 동기를 '시기심'이었다고 명확히 증언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실존적 드라마이다. 가인은 하나님께 더 큰 인정과 축복을 받은 동생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동생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칼이 되었다. 하나님이 아벨을 '받으심'이, 곧 자신을 '버리심'이라는 지독한 영적 비교 의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의 분노는 아벨을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는다고 느낀 '하나님'을 향했다. 시기심의 가장 무서운 점이 이것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미움으로 시작되는 듯 보이나, 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라는 창조주를 향한 원망과 분노에서 자라난다.
이처럼 시기심은 단순한 감정의 동요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에 퍼지는 맹독이며,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의 불씨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질투하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독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친구'라는 이름의 거울: 왜 그녀의 행복이 나를 찔렀는가
우리에게는 누구나 한때 가장 가까웠던, 그러나 지금은 마음속으로 멀어진 '그 친구'의 이야기가 하나쯤 있다.
한 여성의 고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이해한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나누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소위 말하는 '좋은 길'을 걸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갔으며, 다정하고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반면, 그녀의 삶은 기대처럼 풀리지 않았다. 취업의 문은 높았고, 인간관계는 삐걱거렸으며, 결혼은 요원해 보였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친구의 행복을 축하하려 애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친구의 기쁜 소식은 그녀의 심장을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하나님, 왜 저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주시고, 나에게는 이렇습니까?"
비교는 멈출 수 없는 늪이 되었다. 친구의 SNS를 보며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점차 연락을 피하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결국 둘 사이의 견고했던 우정은, 이름 모를 질투의 독에 서서히 부식되어 끊어지고 말았다.
수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 친구의 행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것은, 비교라는 거울 앞에 스스로를 세운 '자기 안의 시기심'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그 친구의 '삶'이 아니라, 그 삶을 통해 증명받고 싶었던 '자신의 가치'였다.

비교는 불행의 시작, 감사는 행복의 완성
시기심은 우리의 영혼을 밑바닥부터 갉아먹는 암세포이다. 우리는 남들이 가진 것을 바라보며 내게 없는 것에 불만을 키우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허락하신 고유한 선물들의 가치는 땅에 묻어버린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곧 우리 삶의 방향이 된다. 시기심은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타인'에게로 돌려, 그들의 삶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감사는 우리의 시선을 '나에게 주어진 것', 그리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리게 한다.
비교하면 영원히 불행하고, 감사하면 비로소 행복해진다. 이것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철칙이다. 질투는 우리를 타인의 노예로 만들지만, 감사는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주인으로 세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독한 시기심의 노예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첫째, '나의 길'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해독제이다. 우리는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지만, 그 근원은 결국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실수나 미완성품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완벽한 계획과 지혜로 빚으신,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걸작이다.
하나님께는 '나'를 향한 고유한 길이 있고, '나'에게 맞는 정확한 시간이 있다. 남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옆 사람의 트랙에서 꽃이 피었다고 해서, 내 트랙이 황무지라는 뜻이 아니다. 내게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속도에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명하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신실함을 배워야 한다.
바울 사도는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라고 고백했다. 이 '자족'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를 '배웠기(learned)' 때문에 가능한 경지였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이 주는 것들로 채워지는 한, 시기심이라는 갈증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영적 훈련을 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치유의 방식이다. 시기심은 마음을 좁쌀처럼 쪼그라들게 만들지만, 축복은 우리의 마음을 태평양처럼 넓힌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는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시기심이라는 죄를 깨뜨리는 영적 명령이다. 내 마음이 가장 아플 때, 바로 그 질투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 이것은 자신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기로 결단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 축복의 기도를 통해 상대방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영혼을 치유하시고 더 큰 그릇으로 빚으신다. 남을 저주하는 마음은 나를 가두지만, 남을 축복하는 입술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셋째, '나의 가치'를 십자가에서 재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남과 비교하며 불안해하는 이유는, 나의 가치가 '내가 가진 것(소유)'이나 '내가 이룬 것(업적)'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우리의 가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가치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를 이만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며,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선포하는 깃발이다.
내 안에 이미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선을 돌려, 나의 길을 가라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는 강력하고 교활한 감정이다. 이 영적 싸움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는 내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더 강력한 무기가 주어졌다.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십자가 안에서 나의 독특한 가치를 확인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질투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그 자유함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삶을 곁눈질하며 불안해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허락하신 그 영광스러운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