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그록(Groq)’ 품고 AI 반도체 판 다시 짠다… GPU 독주 체제 굳히기

학습에서 추론으로: 엔비디아가 그록의 인재를 흡수하며 노리는 차세대 AI 시장의 패권

GPU의 한계를 넘어서: 초저지연 ‘LPU’ 기술 확보가 시사하는 하드웨어의 미래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 경쟁사의 추격을 원천 봉쇄하려는 엔비디아의 ‘해자(Moat)’ 전략

 

컴퓨팅 파워의 정의가 10년마다 바뀌는 기술적 변곡점에서, 엔비디아가 또 한 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최근 엔비디아가 AI 칩 스타트업 그록(Groq)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핵심 엔지니어링 인력을 영입한 사건은 단순한 기업 간 협력을 넘어선다. 이는 AI 하드웨어 시장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신호탄이다.

이번 움직임의 본질은 명확하다. 차세대 AI 가속기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누가 승기를 잡을 것인가, 그리고 현재 시장을 장악한 GPU(그래픽처리장치)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한 엔비디아의 대답이다.

GPU 천하에서 그록의 등장까지: 필연적 진화

엔비디아가 왜 그록에 주목했는지 이해하려면 AI 반도체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 2012~2016년: 딥러닝 기술이 알렉스넷(AlexNet)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게임용으로 설계된 GPU가 신경망 학습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 2017~2021년: 엔비디아는 AI 연구와 산업 적용의 사실상 표준(De facto standard)이 되었다. 클라우드 기업과 스타트업 모두 엔비디아 생태계에 종속됐다.
* 2022~2024년: 생성형 AI(ChatGPT 등)가 대중화되면서 AI는 단순한 연구 대상을 넘어 사회적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연산 수요가 수직 상승하며 GPU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 새로운 흐름: 이 과정에서 TPU, ASIC 등 맞춤형 반도체와 함께 ‘그록’과 같은 기업이 부상했다. 이들은 GPU가 범용성은 뛰어나지만, 대규모 추론 환경에서 요구되는 초저지연(Low-latency)과 처리량(Throughput)에는 최적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록은 “AI 추론을 위해 실리콘 설계를 원점부터 재검토한다”는 철학으로 LPU(언어처리장치)를 선보였다. 이들의 결정론적(Deterministic) 아키텍처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수적인 실시간 트레이딩, 로보틱스, 대화형 AI 분야 엔지니어들의 이목을 끌었다. 엔비디아 역시 시장의 무게중심이 거대 모델의 ‘학습’에서 수십억 사용자에게 모델을 서비스하는 ‘추론’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번 파트너십이 갖는 함의: 3가지 핵심 포인트

엔비디아가 그록의 기술력과 인재를 흡수하는 것은 단순한 시너지가 아니라,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1. ‘돈이 되는’ 시장의 이동: 학습에서 추론으로
맥킨지와 오픈AI 등 주요 기관은 AI 비용 구조의 변화를 예고했다. 모델 학습은 소수의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고비용 영역이지만, 추론은 전 산업에 걸쳐 발생하는 지속적인 수익원이다. 옴디아(Omdia) 등 시장조사기관은 향후 AI 연산 수요의 60~70%가 추론 영역에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록은 바로 이 ‘서비스 실행’ 단계에 최적화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자신들이 ‘학습용 칩 회사’로만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추론 시장의 가치 사슬까지 장악하려 한다.

2. 그록의 비기(秘技): 결정론적 성능 보장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대규모 AI 서비스에서는 단순한 연산 속도(FLOPs)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록은 연산 소요 시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결정론적 실행 모델과 데이터 병목을 최소화한 설계를 통해 GPU 대비 월등히 낮은 지연 시간을 입증해 왔다. 엔비디아는 텐서RT(TensorRT) 등으로 추론 성능을 개선해왔으나, 아키텍처 자체가 다른 그록의 접근 방식을 내재화함으로써 ‘탈(脫) GPU’ 시대의 기술적 리스크를 헤징(Hedging)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3. 잠재적 경쟁자 싹 자르기
IT 업계에서 선두 기업이 위협적인 스타트업을 흡수하는 패턴은 반복되어 왔다. 그록의 기술과 인재가 AMD나 인텔, 혹은 클라우드 기업(CSP)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엔비디아의 로드맵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이는 경쟁사들이 그록의 기술을 활용해 엔비디아의 아성을 위협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업계의 시각과 전망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다각도로 해석하고 있다.

* 반도체 애널리스트: 엔비디아가 단순한 칩 벤더를 넘어 워크로드 중심의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 클라우드 기업(AWS, Azure, GCP): 자체 AI 칩(Trainium, TPU 등)을 개발 중인 이들에게는 악재일 수 있다. 엔비디아의 칩이 그록의 장점까지 흡수한다면, 자체 칩 개발의 명분이 약해지거나 기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AI 엔지니어 및 연구자: GPU가 추론 영역에서도 결정론적 가속기처럼 작동할 수 있을지, 혹은 학습용 GPU와 추론용 특화 칩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등장할지에 대해 기술적 기대를 걸고 있다.

더 큰 그림: 권력의 집중과 ‘AI 유틸리티’ 시대

이번 움직임은 기술적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파장을 예고한다.

AI 컴퓨팅 파워가 전기나 통신망 같은 필수 공공재(Utility)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엔비디아의 독점력 강화는 우려를 낳는다. 특정 기업이 AI 연산의 속도, 가격, 접근성을 좌우하게 되면 혁신의 다양성이 저해되고, 스타트업과 연구소의 협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의 이번 행보는 AI가 보편적 인프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대체 불가능한 공급자’로 남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향후 시나리오와 대응 전략

앞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1. 신규 제품 라인업: 그록 스타일의 초저지연 추론 전용 가속기 혹은 하이브리드 칩 출시.
2. 소프트웨어 락인(Lock-in) 강화: 쿠다(CUDA) 생태계에 그록의 결정론적 기술을 통합하여 개발자 이탈 방지.
3. 규제 당국의 개입: AI 하드웨어 시장의 과도한 쏠림 현상에 대한 반독점 감시 강화.

결론적으로, 우리는 ‘GPU 만능주의’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 이제는 ‘아키텍처의 효율성’이 다시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처리량, 지연 시간, 비용, 에너지 효율 중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가? 그리고 그 핵심 역량을 누구에게 의존할 것인가?

AI 관련 기업과 투자자, 정책 입안자들은 단 하나의 미래만 예측하기보다 하드웨어 의존성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AI 모델이 어떤 실리콘 위에서 돌아가는가, 그리고 공급망이 변했을 때 대안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기술 격변기에 생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작성 2025.12.27 11:59 수정 2025.12.2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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