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건 위서다.”
환단고기에 대한 논쟁은 대개 이 한 문장으로 끝난다. 위서라는 판결은 너무도 단정적이고, 그 뒤에 붙는 수식어는 늘 같다. 학계의 공인, 과학적 검증, 합의된 결론. 이 말들은 토론을 멈추게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정말로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환단고기 위서론은 ‘과학적’으로 성립한 결론인가, 아니면 학문 공동체 내부에서 굳어진 하나의 통설인가. 과학은 의심을 전제로 한다. 반증 가능성이 없고,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결론은 과학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럼에도 환단고기 문제에서는 유독 질문 자체가 금기처럼 취급돼 왔다. 이 지점에서 논쟁은 단순한 사서 진위 문제를 넘어, 한국 사학이 무엇을 과학이라 부르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환단고기는 20세기 초 세상에 알려진 이후 곧바로 ‘위서’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주된 이유는 전통 사학계가 요구하는 사료 계보, 즉 원본의 연속성, 인용 기록, 다른 문헌과의 교차 검증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사학은 실증주의를 학문적 생존 전략으로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환단고기는 ‘검증 불가한 민족서사’라는 위치에 놓였다.
문제는 이 판단이 한 번 내려진 뒤 거의 재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의 연구들은 위서라는 결론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만 축적됐다. 반대 방향의 질문은 학문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과학이라기보다는 합의에 가까운 구조였다.

환단고기 위서론의 대표적 논거는 문체의 근대성, 역사 인식의 시대착오, 고대국가 서술의 과장성이다. 분명 검토할 가치가 있는 지점들이다. 그러나 같은 기준을 다른 고대 문헌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역시 후대적 서술과 신화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위서’가 아니라 ‘사서의 한 유형’으로 분류된다. 기준의 일관성은 과학적 판단의 핵심이다. 이는 실증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추정에 가깝다. 최근 고고학 성과들이 기존 통설을 뒤집는 사례들이 반복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는 단정은 오히려 비과학적일 수 있다. 학계 내부에서도 일부 연구자들은 위서론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고 지적해 왔다. 다만 이런 목소리는 주류 담론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과학은 방법론이지 결론이 아니다. 환단고기 위서론은 방법론적 검증을 거쳤다기보다, 특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제된 사례에 가깝다. 반증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는 순간, 학문은 스스로 질문의 폭을 줄인다.
특히 역사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다양한 가설의 공존과 지속적 검토가 중요하다. 환단고기 문제에서 과학이라는 말은 종종 토론을 차단하는 방패로 사용돼 왔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은, 사실상 “더 이야기하지 말자”는 선언에 가깝다. 이것이 과연 학문이 취해야 할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서일 가능성과 사료적 가치의 일부 인정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흑백논리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이다.
핵심은 질문할 자유다. 왜 이 텍스트만은 다시 묻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가. 왜 과학이라는 말이 토론의 종결어가 되었는가. 어쩌면 우리는 역사보다 논쟁을 두려워해 온 것은 아닐까. 학문은 불편한 질문에서 성장한다. 환단고기 논쟁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한국 사학이 얼마나 개방적인가를 묻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위서론이 과학적이려면, 그 결론 역시 언제든 다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닫는 순간, 과학은 신념으로 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