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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회지도층의 최후 방어선,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위기에 몰렸을 때 자주 꺼내 드는 말이다. 비판이 거세지고, 정황이 드러나며, 관련 증거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 이 짧은 문장은 마치 비상탈출구처럼 등장한다. 

 

명백한 사실이 확인되고, 관련 기록과 증언이 차고 넘쳐도 기억은 희미해진다. 이 말이 가진 절묘한 힘은 명확한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거짓말은 아니라고 느껴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책임을 인정하면 처벌이 따르고, 부정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중간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무책임하지만, 거짓은 아니라는 인상을 남긴다.

 

문제는 이 말이 너무 자주, 너무 비슷한 상황에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대형 사고, 정책 실패, 조직적인 은폐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는 놀랍도록 닮은 장면을 본다. 

[사진: 책임 회피하는 순간들, 챗gpt]

기자회견장에 선 인사는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는 개인의 기억력 문제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훈련된 듯한 대응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부터 질문은 바뀐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혹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선택된 말은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더 본질적인 질문도 있다. “왜 권력의 자리에 오를수록 기억은 흐려지는가?”

 

이런 현상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와 책임 체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결과다. 위계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는 결정이 분산되고, 보고 체계는 복잡하게 단계화된다. 

 

그 결과 책임은 흐려지고, ‘내가 직접 하지 않았다’는 말은 곧 ‘내 책임이 아니다’로 해석된다. 기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조직이 설계한 시스템 속에서 조절된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우리는 책임을 지는 사람보다 끝까지 부인한 사람이 더 가벼운 처벌을 받는 장면을 자주 목격해 왔다. 책임을 인정하면 징계를 받거나 사퇴를 해야 하지만, 침묵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오히려 버티기가 가능하다. 

 

그런 장면이 반복되다 보면, ‘기억 상실’은 무능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다. 이 전략은 또다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경험은 조직의 자산이 되고, 회피는 관행이 된다.

 

언어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사과와 책임은 여전히 낯선 문화다. 사과는 반성이 아닌 패배 선언으로, 책임은 도덕이 아니라 법적 리스크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환경에서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가장 안전한 언어가 된다. 명확한 부정도 아니고, 명시적인 인정도 아니기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 공격도 자백도 아닌 중립적인 회피, 그것이 이 말의 본질이다.

 

이 말을 두고 사회는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이는 사회지도층의 무능을 지적한다.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보고받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무능의 고백이다. 

 

반면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오히려 지나치게 계산적이라는 주장이다. 법적 책임을 피하면서도 도덕적 비난은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하면 증거에 막히고, 인정하면 책임이 생긴다. 그 사이에서 선택된 언어가 바로 ‘망각’이다. 이는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집단이 공유하는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시선은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반복되는 회피의 언어 앞에서 대중은 이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일종의 코드가 됐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언어는 본래 소통의 도구지만, 반복되는 회피 속에서 이제는 불신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 말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기억하지 못해도 처벌받지 않는 구조, 몰라도 괜찮은 조직 문화가 유지되는 한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비용은 결국 사회 전체가 감당하게 된다.

 

기억을 잃은 권력은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 없는 권력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피해는 결국 가장 약한 이들에게 돌아간다. 

 

사고의 피해자는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고통은 생생하게 남는다. 하지만 권력자는 기억을 잃음으로써 책임조차도 함께 지워버린다. 이 불균형이 반복될수록 사회는 분노보다 냉소를 먼저 배우게 된다.

 

결국, 기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과 제도의 문제다. 기록이 명확히 남고, 책임의 경로가 분명한 사회에서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제대로 기록되고, 기록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곧 신뢰의 기반이다. 기억보다 망각이 더 안전한 사회,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가 통하는 사회는 결국 책임을 요구하는 제도가 약한 사회일 뿐이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은 자리에 권력을 맡겨도 되는가.” 기억을 잃은 권력이 과연 책임질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왜 이 사회에서는 기억보다 망각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되었는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면죄부가 되지 않는 사회, 기억하지 못하면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묻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말을 앞으로도 수없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가 짓게 될 표정은 조금씩 더 지쳐갈 것이다.

 

 

 

 

 

작성 2025.12.31 00:00 수정 2025.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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