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칼럼] 노후 생활비 시뮬레이션, 숫자로 착각을 깨다

은퇴 전 기대와 은퇴 후 현실, 가계부는 전혀 다른 숫자를 말한다

줄어들 것이라 믿었던 생활비, 왜 노후에는 더 커지는가

연금 계산이 아닌 지출 구조를 바꿔야 하는 이유

 

 

 1. “은퇴하면 돈 쓸 일이 줄어든다”는 착각에서 시작된다

 

“집도 있고, 애들 다 컸고, 출퇴근도 안 하는데 돈이 왜 이렇게 많이 들까.”

은퇴 후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은퇴 전에는 대부분 이렇게 계산한다. 지금 월 500만 원으로 살고 있으니, 은퇴하면 70%만 써도 충분하겠지. 350만 원이면 된다. 여기에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까지 더하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계산은 단순하고 마음은 편해진다.

문제는 이 계산이 현실의 가계부와 거의 닿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은퇴 전 생활비는 ‘회사’라는 시스템 위에 얹혀 있다. 교통비 일부, 식비 일부, 보험 일부, 심지어 의료 정보까지 직장을 통해 간접 보조를 받는다. 이 안전망이 사라지는 순간, 같은 생활을 유지해도 비용 구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은퇴 후 생활비 착각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숫자를 단순화한 계산 습관의 문제다. 그래서 노후 준비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재테크 상품이 아니라 가계부 시뮬레이션이다. 막연한 평균값이 아니라, 실제 지출 항목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는 방식 말이다.

 

 

2. 은퇴 전 가계부: ‘보이지 않는 지원’이 깔려 있다

 

서울에 사는 50대 맞벌이 부부 A의 은퇴 전 가계부를 보자. 월 실수령 소득은 약 750만 원, 이 중 생활비는 500만 원 수준이다.

지출을 뜯어보면 이렇다.
주거비 120만 원, 식비 90만 원, 교통비 40만 원, 보험료 70만 원, 통신비 25만 원, 여가·취미 60만 원, 기타 지출 95만 원. 숫자만 보면 평범하다.

하지만 이 가계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보조가 숨어 있다. 남편의 회사에서 제공하는 단체보험, 아내의 건강검진 지원, 출장과 회식으로 상쇄되는 식비, 출퇴근 정기권 할인, 법인 차량 사용까지. 이 간접 혜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월 60만~80만 원에 이른다.

즉, 은퇴 전 ‘500만 원 생활’은 사실상 560만~580만 원짜리 생활이다. 회사가 일부를 대신 내주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전제가 빠진 채 은퇴 후 생활비를 350만 원으로 낮추는 계산은, 출발선부터 어긋난 셈이다.

 

 

3. 은퇴 후 가계부: 줄어든 소득, 늘어난 필수 지출

 

같은 부부가 은퇴 후를 가정해 보자. 월 소득은 국민연금 220만 원, 퇴직연금 130만 원, 개인연금 50만 원. 총 400만 원이다. 은퇴 전 기대와 비슷하다.

하지만 가계부는 이렇게 변한다.
주거비는 그대로 120만 원. 식비는 외식이 늘며 100만 원으로 상승한다. 교통비는 줄 것 같지만 병원, 취미, 모임으로 30만 원 수준을 유지한다. 문제는 보험과 의료비다. 단체보험이 사라지면서 개인 보험료가 90만 원으로 늘고, 비급여 의료비가 평균 40만 원 추가된다. 통신비는 25만 원 그대로, 여가·취미는 ‘시간이 많아져’ 80만 원으로 늘어난다.

이렇게 계산한 은퇴 후 월지출은 약 585만 원이다.
은퇴 전보다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었다. 가장 큰 차이는 의료비와 여가비다. 은퇴는 활동이 줄어드는 시기가 아니라, 활동의 성격이 바뀌는 시기다. 무료였던 시간은 종종 유료 취미로 바뀐다.

  

 

 

4. 숫자가 알려 주는 진짜 리스크는 ‘수명’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더 아껴 살면 되지 않나.” 물론 가능하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다.

통계청 기준 기대수명은 이미 83세를 넘었다. 은퇴 시점을 65세로 잡으면 최소 18년, 길게는 25년 이상을 이 가계부로 버텨야 한다. 월 180만 원의 적자가 20년간 이어지면 단순 계산으로 4억 3천만 원이다. 이것이 노후 자금이 빠르게 고갈되는 이유다.

그래서 노후 준비의 핵심 질문은 “얼마가 필요할까”가 아니다. “내 가계부는 은퇴 후 어떻게 변할까”다. 연금 상품 비교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퇴 후 버전의 가계부를 직접 써 보는 것이다. 의료비, 여가비, 보험료를 보수적으로 잡고, 회사가 대신 내주던 항목을 전부 복원해 보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깨닫는다. 노후 불안의 본질은 소득 부족이 아니라 생활비 착각이라는 사실을.

 

 

5. 결론: 노후 준비는 투자보다 ‘가계부 설계’다

 

노후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가계부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다. 기대 생활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안심하는 순간, 현실은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숫자를 너무 대충 쓸 뿐이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은 간단하다. 지금 가계부를 복사해 ‘은퇴 후’라는 제목을 붙이고, 회사 지원 항목을 모두 삭제한 뒤 의료비와 여가비를 늘려 적어보는 것이다. 그 결과가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이 바로 노후 준비의 출발점이다.

연금 상품을 더 살지 말지는 그다음 문제다. 먼저 숫자로 착각을 깨는 일이 필요하다.

 

작성 2026.01.12 05:55 수정 2026.01.12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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