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이 멈춘 날, 병원비는 시작됐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의 가계부에는 늘 비슷한 문장이 적혀 있다. “이제 큰돈 나갈 일은 없겠지.” 대출은 거의 끝났고, 자녀 교육비도 마무리됐다. 생활비는 줄고 시간은 많아진다. 그런데 은퇴 후 1~2년이 지나면 가계부의 한 줄이 서서히 두꺼워진다. 병원비다. 처음엔 정기 검진이었다. 다음은 허리, 무릎, 위장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달 병원에 쓰는 돈이 고정비처럼 자리 잡는다. 예상은 빗나갔고, 의료비는 늘 예산을 초과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이는 개인의 건강 관리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은퇴 이후 의료비는 단순히 ‘병원에 더 자주 가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보험 구조와 비급여 지출이라는 두 축이 가계부를 조용히 흔들고 있다.
은퇴 후 가계부는 어떻게 변하는가
현역 시절 가계부의 중심은 주거비, 교육비, 교통비였다. 의료비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회사 단체보험이 있었고, 병원에 갈 시간도 많지 않았다. 은퇴 후 구조는 달라진다. 소득은 연금 중심으로 단순화되고, 고정비 중 상당수가 의료비로 이동한다. 문제는 이 증가가 급격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달 5만 원, 10만 원씩 늘어나는 의료비는 체감이 늦다. 그러나 1년, 3년, 5년이 지나면 연간 수백만 원의 차이를 만든다.
여기에는 인구학적 요인도 작용한다.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만성질환 관리가 필요해진다. 고혈압, 당뇨, 관절 질환은 치료가 아니라 관리의 영역이다. 관리란 정기적 방문과 검사, 약 처방을 의미한다. 가계부에서 의료비는 일회성 지출이 아니라 반복 지출로 변한다. 이 시점부터 의료비는 생활비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고정비’가 된다.
건강보험은 충분한가
많은 은퇴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한국은 건강보험이 잘돼 있잖아.” 맞는 말이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은 기본 진료와 필수 치료 영역에서 상당한 보호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보호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 바깥이 바로 비급여다. 건강보험은 생명과 직결되거나 표준화된 치료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문제는 노년기의 의료 수요가 이 표준을 자주 벗어난다는 점이다.
도수치료, 체외충격파, 각종 주사 치료, 고급 영상 검사, 상급 병실료 등은 보험 적용이 제한적이거나 아예 제외된다. 의사는 “하면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보험은 “필수는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이 간극에서 선택은 환자의 몫이 된다. 은퇴자는 건강을 이유로 선택을 미룰 수 없다. 결국 비급여는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의 필수가 된다. 이 구조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제도적 한계라기보다, 급속한 의료기술 발전과 고령화가 만든 현실적 결과에 가깝다.
비급여가 가계부를 잠식하는 방식
비급여의 가장 큰 문제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급여 항목은 대략적인 본인 부담률이 정해져 있다. 반면 비급여는 병원마다 가격이 다르고, 치료 횟수에도 상한이 없다. 가계부 입장에서 이는 ‘통제 불가능한 지출’이다. 은퇴 후 의료비가 예산을 초과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계획은 평균을 기준으로 세워지지만, 실제 지출은 예외로 움직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심리적 요인이다. 은퇴자는 시간을 건강과 교환하려 한다. 현역 시절 미뤄둔 치료와 관리가 한꺼번에 몰린다. “지금 관리하지 않으면 더 큰 병이 된다”는 불안은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지출을 가속한다. 이때 가계부는 경고를 보내지 않는다. 의료비는 ‘아껴도 되는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료비는 생활비를 잠식하고, 여유 자금을 줄이며, 노후 자산의 소진 속도를 앞당긴다.

은퇴 의료비, 대비의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은퇴 후 의료비를 줄이는 방법을 묻는 질문은 이제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비급여 지출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가.” 건강보험이 해결해 주지 않는 영역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의료비는 줄이는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위험이다. 은퇴 설계에서 의료비는 변수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해 계산해야 한다.
가계부는 정직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은퇴 후 의료비가 항상 예산을 초과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낙관적인 전제를 세웠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비급여는 예외일 것이라는 기대가 겹쳤다. 이제 질문을 바꿀 때다. 은퇴 이후의 의료비는 얼마가 들까가 아니라, 어디까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를 먼저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이 노후 가계부를 지키는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