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리는 손으로 올린 일생의 무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준엄한 법정인가, 따뜻한 품인가
중동의 광활한 모래 언덕 위에서 만난 한 베두인 청년은 모닥불 빛에 기대어 나직이 읊조렸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내일 아침 알라의 저울 위에서 얼마나 무겁게 다루어질지 생각하면 심장이 뜁니다. 그분의 자비(Rahma)가 나의 죄보다 크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그의 눈동자에는 신을 향한 지극한 경외와 함께, 심판 앞에 선 인간의 근원적 불안이 서려 있었다.
이슬람권에서 살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영혼을 가장 깊게 흔드는 질문은 "신은 나를 어떻게 대하시는가?"라는 점이다. 이슬람이 그리는 ‘저울(Mizan)’은 인간의 책임을 극대화하는 준엄한 정의의 상징이며, 기독교가 선포하는 ‘십자가’는 그 정의를 온몸으로 받아낸 신의 파격적인 사랑의 상징이다. 심판이라는 차가운 현실과 자비라는 뜨거운 소망이 두 문명의 신학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 신비로운 균형의 지점을 추적한다.
왜 자비와 심판은 공존해야 하는가: ‘거룩’과 ‘사랑’의 이중주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알-라만(Ar-Rahman, 지혜로운 자비)’과 ‘알-라힘(Ar-Rahim, 지극한 자비)’으로 요약된다. 꾸란의 거의 모든 장이 이 수식어로 시작된다는 점은 이슬람이 얼마나 자비를 강조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 자비는 무조건적인 방임이 아니다. 알라는 동시에 ‘알-하캄(Al-Hakam, 공정한 재판관)’이다. 이슬람의 세계관에서 심판은 신이 세운 우주 질서의 완성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그 행위에 책임을 묻는 것은 신의 ‘공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를 받아주는 것이 신의 ‘자비’다. 이 둘은 저울의 양팔처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신자를 겸손하게 만든다.
기독교 관점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은 ‘십자가’라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기에 심판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분은 자기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이기에 자비를 베푸셔야 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 바로 ‘대속(Substitution)’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심판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쏟아졌고, 자비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이슬람이 인간의 행위가 저울 위에서 자비의 무게를 얻기를 힘쓴다면, 기독교는 이미 쏟아진 자비의 강물에 자신을 던져 심판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0.01g의 저울과 쏟아지는 보혈: 심판의 풍경
이슬람의 심판 날, 신자의 모든 행위는 ‘미잔(Mizan, 저울)’ 위에 올려진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선과 악도 무시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나의 선행이 악행보다 무겁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여기서 자비는 법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족한 노력을 갸륵히 여겨 그 무게를 늘려주시는 신의 배려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앙은 ‘희망’과 ‘두려움’ 사이의 정교한 줄타기다. 알라의 자비를 확신하면서도, 자신의 죄가 저울을 기울게 할까 봐 매 순간 정결한 삶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독교의 심판대(Bema Seat)는 ‘상급’의 자리이자 ‘감사’의 자리다. 복음주의자들에게 형벌로서의 심판은 이미 지나갔다. 우리가 신 앞에 섰을 때 신은 우리의 죄목을 나열하는 대신, 우리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신다. 기독교의 자비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은총(Grace)’이다. 기독교인은 심판을 면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자비가 너무나 커서 그 사랑에 반응하여 선을 행한다. 이슬람의 자비가 ‘조건적인 격려’라면, 기독교의 자비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다.
"알라의 자비가 진노를 앞선다"와 "다 이루었다"
이슬람 신학에는 "나의 자비는 나의 진노를 이긴다"라는 유명한 ‘쿠드시 하디스(신성한 하디스)’가 있다. 이는 심판이 엄중할지라도 신의 본성은 결국 용서에 있음을 강조한다. 중동의 모스크에서 울려 퍼지는 참회의 기도 소리는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가장 정직한 통곡이다. 그들에게 자비는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최고의 예우’이며, 인간은 그 자비를 얻기 위해 일생을 다해 순종을 바친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인 "다 이루었다(Tetelestai)"에 인생을 건다. 이는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다는 상업적 용어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에게 고난과 질병조차 심판의 징조가 아닌, 더 큰 자비를 경험하게 하려는 신의 세심한 간섭이다. 우리는 심판 주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심판받으신 ‘아바 아버지’를 만난다. 이슬람의 현장이 신의 ‘엄위하심’ 앞에 엎드리는 장소라면, 기독교의 현장은 신의 ‘다정함’에 안기는 장소다.
당신의 인생을 달아볼 그날의 무게
나는 두 종교가 말하는 자비와 심판이 결국 우리의 ‘교만’을 꺾기 위한 신의 장치임을 깨달았다. 이슬람의 저울은 우리로 하여금 "나는 충분히 선하다"라는 착각을 버리게 하고, 기독교의 십자가는 "나는 가망 없는 죄인이다"라는 절망을 거두게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신을 기다리고 있는가? 행위의 무게를 꼼꼼히 따지는 저울 앞에서의 긴장인가, 아니면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십자가 아래서의 평안인가? 신은 공의롭기에 우리를 심판하셔야 하지만, 자비롭기에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 하신다. 그 거룩한 갈등이 해결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린다. 심판은 우리가 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고, 자비는 우리가 신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한다. 저울과 십자가, 이 두 날개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낙원으로 실어 나르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