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서 보라” — 예수를 만난 그날, 인생이 달라졌다
요한복음 1장 35–51절의 이야기는 신앙의 시작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향해 외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 외침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구속자의 등장을 선언하는 영적 사건이었다.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다. 그들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분 안에 무언가 있다.’
오늘의 신앙인들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모두 이해한 후에’가 아니라, ‘따라감으로 시작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깊은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라삐여,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는 “와서 보라”고 대답한다.
이 짧은 대화는 신앙의 본질을 압축한다. 신앙은 설명으로만 세워지지 않는다.
‘와서 보라’는 초대는 이론이 아닌 체험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가 함께 머물렀을 때, 단순한 호기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그날, 그들의 인생은 달라졌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 가장 먼저 형제 시몬(베드로)에게 달려간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예수와의 만남은 전염된다. 진짜 만남은 전해지게 되어 있다.
그는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고, 예수는 그에게 “너는 게바라 하리라”(베드로, 반석)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만남이 또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만난 자는 침묵할 수 없다. 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만나지 못한 신앙’이다. ‘들었지만 체험하지 못한 신앙’이다.
예수의 초대는 여전히 우리에게 들린다. “와서 보라.”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한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냉소적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의 말은 인간의 편견을 대변한다.
하지만 빌립은 논쟁하지 않는다. 오직 한 마디, “와서 보라.”
그 만남의 자리에서 예수는 나다나엘의 내면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
그때 나다나엘은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로소이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예수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신다.
요한복음 1장 35–51절은 단지 초대받은 제자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 초대는 지금도 이어진다.
예수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와서 보라.”
이 초대에 응한 자만이 참된 믿음의 체험을 한다.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 한 마디에서 시작된다.
‘와서 보라’ — 믿음은 만남으로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