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ABC, 즉 로마자는 과연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 순수하게 탄생한 문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자는 이탈리아 땅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뿌리는 지중해를 건너온 여러 문명의 산물이다. 로마자는 단일 민족의 창조물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문명 교류의 결과물이다.
시작은 페니키아였다
알파벳의 기원은 기원전 1200년경 동지중해 연안에서 활동하던 고대 상인 민족, 페니키아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복잡한 상형문자 대신, 자음 중심의 단순한 문자 체계를 만들어 지중해 전역에 전파했다. 무역로를 따라 이동한 이 문자는 그리스로 건너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그리스의 혁신, 모음을 더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자음만 존재하던 체계에 모음 개념을 추가했다. 이는 문자 역사상 대혁명이었다. 음성을 보다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문자는 학문과 철학, 정치 담론의 도구로 발전했다. 우리가 오늘날 ‘알파벳’이라고 부르는 말 자체도 그리스 문자 ‘알파(Α)’와 ‘베타(Β)’에서 유래한다.
에트루리아를 거쳐 로마로
그리스 문자는 다시 이탈리아 반도의 고대 문명, 에트루리아인에게 전달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문자가 로마 초기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결국 로마인들은 이를 변형·정비하여 자신들만의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라틴 문자, 즉 우리가 말하는 로마자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로마 제국이 유럽과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면서 라틴 문자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행정, 군사, 법률, 종교 기록에 사용되며 사실상 ‘국제 문자’가 되었고, 이후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뿌리내렸다.
로마자는 이탈리아의 발명품인가?
따라서 로마자는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것은 맞지만, 순수한 이탈리아의 창작물은 아니다. 페니키아 → 그리스 → 에트루리아 → 로마로 이어진 문화적 계승의 산물이다.
오늘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수많은 언어가 로마자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 등 아시아권 언어도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 로마자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문명 교류의 흔적이자 인류 공동 유산인 셈이다.
문자는 ‘소유’가 아니라 ‘계승’이다
로마자가 특정 국가의 전유물이라기보다, 여러 문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협업의 결과라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명은 고립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교류 속에서 진화한다. 우리가 무심코 적는 ABC 속에는 지중해를 건너온 상인들의 배와, 철학을 논하던 그리스 광장, 그리고 로마의 석주에 새겨진 제국의 흔적이 담겨 있다. 결국 로마자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성장한’ 문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