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지에는 벽시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엄마의 시간을 담았습니다.
어느 독자님은 주말에 엄마 댁에 다녀오겠다는 답장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붙인 후에도 계속 엄마의 시간을 생각했습니다.
외할머니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첩첩산중에서 가난을 겪으신 외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그래, 밥은 먹었니?”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밥 걱정없는 시절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렇게 물어보는 할머니가 마뜩하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할머니의 인사말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발작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굶겨야만 했던 그 모질고 비참한 시간은 세월이 지난다고 잊어지는 게 아닌 것을요.
오십이 넘은 여동생은 설을 앞두고 두어 달 동안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른체하고 안부 전화를 걸었더니 똑같이 잘해도 큰오빠 공치사만 하는 엄마한테 심통이 났듯 싶었습니다.
세배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자식들과 엄마의 가벼운 실랑이는 쉽게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 잘못이 더 큰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다만 엄마의 벽시계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 엄마랑 불화한다는 것은 사실 ‘엄마의 시간’과 불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시간이 지금의 엄마를 형성시켰으니까요.
만약 엄마가 잘못했거나 고루하다고 엄마의 시간을 무시한다면 엄마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 순간 우리의 엄마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길 수도 없고, 사과를 받아낼 수도 없는 시간이라는 무정물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일은 그래서 무용합니다.
따라서 엄마를 원망하는 일은 사과할 줄도 모르는 그런 시간에게 불만을 쏟아내고 싸우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엄마의 시간을 헤아려 봅니다.
여자라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시절, 연탄을 한 장씩 사서 때던 가난의 시간, 배우지 못해 기죽어 산 시간, 당신을 위해주던 유일한 사람인 남편과 산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손에 잡힙니다.
엄마는 엄마의 시간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고 안 나오고는 엄마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엄마와의 관계에서 사소한 불편은 수시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기보다는 엄마의 등 뒤로 흐르는 엄마의 시간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실체도 없는 엄마의 시간과 다투느라 감정을 상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흑백의 시간을 원망하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연탄재처럼 허옇게 부서져 가는 그 시간을 향해 용서와 사랑을 바라는 일도 무용합니다.
자녀도 그렇습니다.
자녀의 시간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면 서로 만날 점이 없어지는 셈입니다.
자식이 바뀌길 기대하는 것은, 그의 시간이 무너지길 바라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그가 자신의 시간에서 걸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기다려 만나야 하는 아주 귀한 사이가 분명합니다.
K People Focus 김황종 칼럼니스트
케이피플포커스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 표기 의무.
■ 제보
▷ 전화 : 02-732-3717
▷ 이메일 : ueber35@naver.com
▷ 뉴스홈페이지 : https://www.kpeoplefocu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