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는 돌아갈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증명할 국경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동의 거대한 토로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을 따라 수천 년을 살아온 한 민족에게만은 세계 지도가 유독 인색하다. 인구 4,500만 명. 남한 인구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공동체는 '쿠르드'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만, 그들이 딛고 선 땅의 주소지는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로 제각기 나뉘어 있다. 왜 이들은 자기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했을까. 그 비극의 서막은 100년 전, 강대국들의 차가운 잉크 끝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쿠르드 민족이 분리되어 사는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석유 이권과 정치적 계산을 위해 쿠르드인의 독립 약속(세브르 조약)을 저버리고, 그들의 터전을 인위적인 국경선(로잔 조약)으로 나누어 튀르키예,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강제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배신의 연대기: 약속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쿠르드 민족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희망적이었던 순간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잦아들 무렵, 오스만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쿠르드인들은 제국의 느슨한 통치 아래 부족 중심의 자치권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의 물결은 이들에게도 '우리만의 국가'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1920년 체결된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은 그 꿈이 실현되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며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 즉 '쿠르디스탄'의 건설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불과 3년 만에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튀르키예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영토 보존을 요구하며 전쟁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서구 열강의 '민낯'이 드러난다. 영국과 프랑스는 쿠르드의 독립보다는 중동의 석유 자원 확보와 지정학적 안정이 더 시급했다. 1923년, 세브르 조약을 폐기하고 새로 맺은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에서 '쿠르드'라는 단어는 증발해 버렸다. 강대국들은 자와 컴퍼스를 들고 자신들의 이권에 맞춰 중동의 지도를 다시 그렸다. 이 인위적인 국경선은 쿠르드인들이 수천 년간 공유해온 삶의 터전을 네 개의 국가로 난도질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갈등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쿠르드 민족이 겪는 모든 고난의 원죄다.
찢겨진 영혼들: 4개의 국가, 4개의 비극
국경선이 그어진 후, 쿠르드인들은 각기 다른 네 개의 국가에서 '불온한 소수자'로 전락했다. 각 지역의 상황은 저마다의 색깔을 띤 비극으로 채워졌다.
▲튀르키예-잊히기를 강요받은 '산악 튀르크인': 가장 많은 쿠르드인(약 2,000만 명)이 거주하는 튀르키예에서 그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부정당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한때 이들을 '산에 사는 튀르크인'이라 부르며 쿠르드어 사용과 고유 의상을 법으로 금지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동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저항을 불렀다. 1970년대 말 등장한 쿠르드 노동자당(PKK)은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으나, 튀르키예 정부는 이들을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가혹한 군사 작전을 이어오고 있다. 수만 명의 생명이 이 충돌 과정에서 스러졌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라크-학살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자치의 꽃: 이라크의 쿠르드인들은 가장 처절한 고통을 겪은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성취를 이룬 집단이다. 1988년 사담 후세인 정권은 '안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쿠르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특히 할랍자 마을에 살포된 화학무기는 단 몇 분 만에 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이 비극은 오히려 국제 사회의 공분을 샀고,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이들은 북부 지역에 쿠르드 자치정부(KRG)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이들은 자체 군대인 '페쉬메르가'와 국회, 석유 수출권까지 보유하며 독립에 가장 근접한 상태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쿠르드 민주당(KDP)과 쿠르드 애국동맹(PUK) 사이의 권력 투쟁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란-문화적 인정과 정치적 압살 사이: 약 1,000만 명의 쿠르드인이 사는 이란은 튀르키예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인다. 이란 정부는 쿠르드인의 언어나 문화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자치권이나 독립 요구에는 가차 없는 철퇴를 내린다. 특히 최근 이란 내 인권 운동과 맞물려 쿠르드 지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이곳에서는 이란 쿠르드 민주당(KDPI)과 PKK의 계열 조직인 이란 쿠르드 자유생명당(PJAK)이 지하에서 저항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시리아-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찾은 '로자바'의 꿈: 시리아 내전은 쿠르드인들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정부군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북동부 지역을 장악한 이들은 로자바(Rojava)라 불리는 자치 지역을 선포했다. 이들은 민주동맹당(PYD)을 중심으로 인민보위부대(YPG)와 여성보위부대(YPJ)를 조직해 ISIS(이슬람국가) 격퇴전의 선봉에 섰다. 특히 총을 든 여성 전사들의 모습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튀르키예 정부는 이들을 PKK의 연장선으로 보고 끊임없이 공격하며 이들의 실험을 위협하고 있다.
산은 말이 없어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중동의 거친 사막과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내게, 쿠르드라는 단어는 더 이상 국제 정치학의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다. 이름 없는 마을의 차가운 흙바닥 위에서 건네받았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 나라 없는 서러움을 노래하던 그들의 애잔한 현악기 소리, 그리고 "우리에게는 산 외에는 친구가 없다"며 씁쓸하게 웃던 청년의 눈망울이 지금도 생생하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지만, 삶은 약자의 눈물로 쓰인다. 강대국들이 지도를 자르고 석유 이권을 계산하는 동안, 한 민족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교과서조차 가지지 못한 채 총을 들어야 했다. 우리는 흔히 이들을 '이용당하는 민족'이라 부르지만, 그 이면에는 100년을 견뎌온 지독하리만치 숭고한 생존 의지가 서려 있다.
오늘도 중동의 전운은 짙어만 가고, 쿠르드인들은 다시 한번 강대국들의 체스판 위에 놓인 말이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본 그들은 단순히 소모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척박한 바위 틈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생명의 군단이었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단순히 멀리 있는 타자의 불행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약속의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산맥이 그들의 유일한 친구라면, 이제는 우리가 그 산맥의 그림자가 되어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을까. 긴 밤을 지나 새벽을 기다리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인내가 오늘 나의 가슴에 깊은 파동을 일으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