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기 가장자리가 붉은가? 덜 익은 것인가?"
그 물음 속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불을 오해해 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불은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공포. 그러나 오래 불을 다루어 온 사람은 안다. 그 분홍빛 띠는 실패가 아니라, 불과 시간이 합작해 남긴 가장 정직한 증거라는 것을 안다.
그 붉은 고리는 시간이 고기에 새긴 서명인 것이다.
여기서 연기가 주는 불의 철학을 엿 볼 수 있다. 그것이 스모크 링(smoke ring)이다.

미오글로빈과 불의 언약에 나온 결과다. 바비큐 고기를 자르면 단면 바깥쪽 수 밀리미터에 분홍빛 고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히 연기가 착색된 것이 아니다. 나무와 숯이 연소하며 생성된 질소 산화물(NO, CO)이 고기 속 단백질인 미오글로빈(myoglobin)과 결합하면서 만들어지는 화학적 반응이다.
그런데 이 반응에는 결정적인 조건이 있다. 미오글로빈은 고기 내부 온도가 약 60°C(140°F)에 이르면 서서히 열변성(denaturation)을 시작한다. 그리고 77°C(170°F)에 도달하는 순간, 완전히 반응 능력을 잃는다. 스모크 링이 형성될 수 있는 시간의 창(窓)은 바로 이 두 온도에 도달하기 전 긴 시간과, 이 두 온도 사이의 극히 짧은 구간 안에서만 열려있고 작용한다. 그 창이 서서히 좁아지고 완전히 닫히면 이후 작용은 멈춘다. 그 사이에 가스가 고기 안으로 충분히 침투해야만 붉은 고리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억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두른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양질의 연기와 온도, 시간이 자연스럽게 조성이 되었을 때, 과정이 스스로 남기는 흔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말했다. "불은 만물의 아르케(arche)다." 그에게 불은 단순한 원소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원리 그 자체였다. 스모크 링은 바로 그 원리가 고기 위에 남긴 서명(署名, signature)이다.
맛이 아닌 과정의 흔적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설이 하나가 있다. 스모크 링은 맛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많은 이들이 붉은 고리가 곧 훌륭한 바비큐의 증거라 믿는다. 그러나 풍미(風味, flavor)는 스모크 링이 아니라, 마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과 느린 열전달, 렌더링(rendering)된 콜라겐, 그리고 수백 가지 향미 화합물이 결정한다. 스모크 링은 그 과정이 올바르게 진행되었다는 시각적 증언일 뿐이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흔히 '결과'를 삶의 척도로 삼는다. 富(부), 名譽(명예), 成就(성취). 그것들이 충분히 쌓이면 좋은 삶이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스모크 링이 고기의 맛을 만들지 않듯, 그 축적물들이 삶의 깊이를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깊이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질(quality of process)에서 온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번영하는 삶'을 정의할 때 그가 강조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잘 행위하는 것(eu prattein)'이었다. 잘 타오른 불이 스모크 링을 남기듯, 잘 살아낸 삶이 긍정적 흔적을 남긴다.
불을 다루는 세 가지 방식, 세 가지 삶을 살펴보면 그릴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세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가 소모(消耗)하는 삶이다. 이것은 온도가 높다, (High Heat) 불을 너무 세게 피워서 빠른 결과를 원한다. 고기 내부 온도는 순식간에 77°C를 넘어버리고, 미오글로빈이 반응할 창은 열리기도 전에 닫혀 버린다. 스모크 링은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로마 제국 말기의 과잉 팽창처럼, 혹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인의 속도 숭배처럼 불꽃은 화려하지만 재만 남는다.
둘째는 보전(保全)하는 삶이다. 이것은 불이 없다. (No Fire) 불을 피우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릴 위에서는 아무것도 익지 않는다. 온도가 없으면 연기는 피어 오르지 않는다. 연기가 없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를 거부하는 삶은 안전해 보이지만, 실은 서서히 굳어가는 정체(停滯)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無爲(무위)를 오독한 방식이기도 하다. 노자가 말한 무위는 행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행함이었다.
셋째는 변화(變化)하는 삶이다. 이것은 아주 느리고 낮다. (Slow & Low) 불을 천천히, 꾸준히 유지한다. 미오글로빈이 변성을 시작하기전까지 변성이 시작되는 60°C와 완전히 닫히는 77°C 사이까지. 그 창이 열려 있는 동안 연소산화물들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시간을 허락하는 것. 이것이 원시주의 바비큐(primitivist barbecue)의 본질이다. 인류 최초의 화식(火食)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은 서두름이 아니었다. 자연의 시간과 함께하는 행위였다.
그 불 앞에서 스모크 링이 말없이 생겨난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과정이 스스로 그려낸 고리가 형성된다.
이것은 時間의 서명이기에 가능성의 창이 닫히기 전에 최대한 역할을 하게 하여야 한다.
하이데거(Heidegger)는 인간을 '시간 안에 던져진 존재(Dasein, 현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을 다루는 행위인 바비큐는 그 시간과의 가장 원초적인 대화다.
스모크 링의 물리학은 이 진실을 아주 정밀하게 보여준다. 변화는 어느 한 순간 뚝 끊기는 것이 아니다. 변성되기 전인 60°C에 이르기 전. 그리고 변성이 시작되는 60°C에서 창이 닫히는 77°C까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인간의 전성기도, 어떤 관계의 유효기간도, 역사적 전환점도 서서히 가능성을 잃어간다. 문제는 그 창이 열려 있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불을 지켰느냐다.
스모크 링은 그 대화가 성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증거다. 이것은 인간의 생애주기와 도 같다.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화를 허락하는 것. 불의 리듬에 맞추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이것이 바비큐가 단순한 조리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儀式, ritual)인 이유다. 불 앞에 선 인간은 지금도 수십만 년 전 동굴 입구에서 처음 불씨를 지켰던 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때도, 지금도 불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오래된 조건이다.
붉은 고리가 선명하고 확신차게 남는 삶이 중요하다. 결국 스모크 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인생을 돌아보면 된다.
너무 태우지 말고, 불을 끄지도 말고, 가능성의 창이 열려 있는 그 시간 동안에 자연스럽게 타오르게 두라.
그러면 어느 날, 삶의 단면을 잘랐을 때, 회고의 순간이던 혹은 마지막 순간이던 가장자리에 조용한 붉은 고리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낸 시간의 진실이, 내가 견디어 낸 불의 시간만큼, 내가 균형을 잃지않고 그 앞에 서 있었던 순간들이 스스로 새겨둔 흔적이 된 것이다. 마치 잘 익은 바비큐처럼 야들야들하고 풍미 가득한 인생으로 고운 접시에 담길 것이다.
스모크 링은 바비큐의 장식이 아니다. 가능성의 창이 닫히기 전, 시간이 고기에 새긴 서명이다.
저자
Shaka (차영기, 경기도 화성시, 샤카스바비큐)
프로바비큐어
바비큐 프로모터 겸 퍼포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
바비큐 인문학자 / 바비큐 작가
Korea Barbecue University
Korea Barbecue Research & Institute
이메일 araliocha@gmail.com(010-2499-92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