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9일부터 열흘간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70차 여성지위위원회(CSW70)가 3월 19일(현지시간), 전 세계 여성과 소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사법 정의’ 로드맵을 채택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원 합의’가 아닌 ‘표결’을 통해 최종 결론이 도출되는 진통을 겪으며, 국제사회의 깊은 가치관 균열과 다자주의의 위기를 동시에 드러냈다.
■ 사상 초유의 ‘기록 표결’… 고립된 미국의 반대표
이번 CSW70의 최대 쟁점은 결과 문서인 ‘합의결론(Agreed Conclusions)’의 채택 방식이었다. 관례적으로 CSW는 회원국 간의 치열한 협상을 거쳐 만장일치로 결론을 도출하는 ‘컨센서스(Consensus)’ 방식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미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합의문에 포함된 특정 용어와 개념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며 공식적인 표결을 요구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37표, 반대 1표(미국), 기권 6표(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알제리,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모리타니)로 나타났다. 미국이 여성 인권 관련 국제회의에서 단독으로 반대표를 던지며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모습은 극히 이례적인 장면으로, 회의장 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 충돌의 핵심: ‘언어의 정치학’과 수정안 부결
미국 대표단이 반대표를 던진 구체적인 이유는 그들이 제출한 8개의 수정안이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것에 기인한다. 미국의 수정안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영역에 집중되었다.
낙태권 방어 차단: 미국은 합의문 내 ‘성·생식 건강 및 권리(SRHR)’라는 용어가 낙태의 보편화를 정당화할 수 있다며, 이를 ‘가족 계획 및 모성 건강’이라는 보다 제한적인 표현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디지털 검열 우려: ‘온라인상의 성별 기반 폭력 대응’ 조항에 대해 미국은 기술 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표현의 자유와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며 완화된 표현을 주장했다.
젠더 개념의 고착화 반대: 미국 측은 ‘성별(Gender)’이라는 용어가 생물학적 성을 넘어 다원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 “특정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강요”라고 명명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 기권 6개국이 던진 메시지: “보편성 대 특수성”
기권표를 던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협력기구(OIC) 국가들의 입장도 단호했다. 이집트 대표는 기권 이유에 대해 “국가 주권의 존중은 다자주의의 기초”라며, “합의문이 특정 지역의 사회적, 종교적 가치를 무시한 채 서구 중심적인 정의(Justice)를 강요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특히 이들은 아동 조혼 금지와 가족법 개정 요구가 국가의 고유한 사법 체계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국제 인권 규범의 ‘보편성’과 각국 문화의 ‘특수성’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CSW70이 제시한 미래 아젠다: 사법 정의와 기술 혁신
이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이번에 채택된 합의결론은 인공지능(AI) 시대에 부합하는 여성 인권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다.
AI 거버넌스의 젠더 정의: 이번 합의문은 사상 최초로 ‘AI 알고리즘의 성별 편향성 방지’를 국제적 약속으로 명시했다. 인공지능이 사법적 판단이나 채용, 금융 서비스에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도록 설계 단계부터 여성 전문가의 참여를 30% 이상 확보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술 매개 폭력(TFGBV) 처벌: 딥페이크 성착취물과 온라인 스토킹을 ‘심각한 인권 침해’로 규정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디지털 범죄에 대해 각국 사법 당국이 공조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사법 접근성 강화: 법률 지원 서비스에서 여성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모든 법적 절차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적용하는 ‘젠더 사법 가이드라인’ 제정이 포함되었다.
■ [분석] 국제 정세에 미칠 파장: 다자주의의 위기인가, 진통인가
이번 표결 사태는 국제사회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여성 인권의 정치적 도구화다. 과거 여성 인권은 국가 간 이견이 있더라도 대화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연성 권력(Soft Power)’의 영역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체제와 가치관의 우위를 다투는 ‘강성 정치(Hard Politics)’의 전장으로 변모했다.
둘째,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변화다. 여성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미국이 보수적 기조를 앞세워 국제적 합의를 거부한 것은 향후 UN 여성기구(UN Women)에 대한 분담금 지원이나 글로벌 캠페인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셋째, ‘포스트-컨센서스’ 시대의 도래다. 만장일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번처럼 ‘다수결 투표’를 통한 의사결정이 빈번해질 경우, 국제적 결의의 실행력이 약화될 위험이 있다.
■ 정의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발걸음
시마 바후스 UN 여성기구 사무총장은 폐막 연설에서 “오늘의 결과는 여성 인권이 더 이상 타협이나 거래의 대상이 아님을 전 세계가 선언한 것”이라며 진보의 길을 선택한 국가들에 경의를 표했다.
이번 CSW70의 결론이 문서에 머물지 않고 각국 현장에서 실질적인 법 개정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특히 기술이 정의를 앞서가는 시대에, 이번 합의문이 ‘디지털 정의’의 초석이 되기를 희망하며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변화를 예리하게 주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