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최진실 기자] 부여의 하루는 평소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같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기류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백마강을 품은 이 땅 위에서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단순한 토론회 이상의 무엇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축적된 고민과 기다림, 그리고 쉽게 꺼내지 못했던 희망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주최와 주관, 후원과 협력으로 이어진 여러 손길들 속에서 ‘이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결심이 전해졌다. 준비한 이들의 수고는 말없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메시지였다.
전문가들과 교수님들의 발제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이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물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백마강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그곳에 살아가는 생명들이다.”
짧지만 무거운 이 문장은,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대상화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강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흐르는 생명이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을 떠받치는 근원이었다. 그 강을 정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조성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다른 발제에서는 ‘정체성’이라는 화두가 이어졌다. 부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백제의 역사, 깊은 문화, 그리고 백마강이라는 자연.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지 못했을 때, 그 가치는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백제 백마강 정원’이라는 개념은 바로 그 지점을 꿰뚫고 있었다.
정원은 단순히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담고, 이야기를 담고, 사람들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벽돌 하나, 길 하나에도 백제의 미학이 스며든다면, 그곳은 더 이상 조경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콘크리트로 빠르게 완성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며 깊어지는 공간.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정원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거버넌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많은 사업들이 행정 주도로 추진되었지만, 지속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정원은 다르다. 정원은 누군가 대신 가꾸어 줄 수 없는 공간이다. 결국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하고, 마음이 머물러야 유지된다.
시민이 참여하고, 나무를 심고, 시간을 함께 쌓아가는 과정. 그것이 곧 정원의 본질이다. 광주의 사례처럼, 시민이 주인이 되는 구조 속에서만 정원은 살아 숨 쉴 수 있다. 백마강 정원 역시 민·관·산·학이 함께하는 구조 속에서만 지속가능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 교수님의 말씀이 다시 마음을 울렸다.
“정원은 공간이 아니라, 정체성을 담는 그릇이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단순한 관광 자원이 아닌, 부여라는 도시의 정신과 방향성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원과 평생교육, 도시재생이 연결되는 그림은 단순한 개발을 넘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 한편으로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얻었다. 정원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수십 년을 바라보는 과정이다. 식물 하나의 선택이 생태계를 바꾸고,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고 다시 채워지는 순환의 공간.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환경에 대한 메시지도 깊이 다가왔다. 멸종 위기 식물,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이제 정원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대적 책임을 담아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백마강 정원은 지역을 넘어, 미래 세대와 연결되는 약속이 되어야 한다.
행사 전 들려온 한 소식은 그날의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국가 차원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는 신호. 그 순간, 막연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퍼져 나갔다.
행사는 끝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무엇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부여발전시민네트워크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서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고, 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날만큼은 분명히 참여자였다. 가곡 ‘선구자’를 연주했던 순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하나였다.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작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행사 전, 포스터를 들고 부여의 여러 게시판을 돌아다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소박하고 조용한 노력들이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오늘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모임, 몇 번의 고민, 그리고 몸으로라도 함께하고자 했던 시간들.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흐름이 되었고,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졌다.
백마강 정원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더 깊은 숙의와 더 넓은 참여가 필요하다. 행정과 시민이 신뢰를 쌓아가며 함께 방향을 만들어야 한다. 부여가 가진 생태와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정원. 그것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하나의 유산이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페이지 위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K-컬처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
백제의 후예들이 다시 손을 맞잡고
미래를 심기 시작한 그날이다.
천만상
· 원불교 대전충남교구
부여문화특성화교당 주임교무
· 자살예방 전문강사불교 교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