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동화 - 7편 무엇을 원하니?
봄비가 그친 오후였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학원으로, 집으로 흩어졌다. 유진이는 혼자 학교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노란 민들레가 가득 피어 있었다. 유진이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가, 다시 주웠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요즘 유진이의 마음은 자꾸만 복잡해졌다. 엄마는 피아노를 더 열심히 하라고 했다. 아빠는 수학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은 저마다 되고 싶은 것을 자신 있게 말했다. 유진이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또렷하게 남지 않았다.
사실,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림.
유진이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았다. 연필로 선을 긋고, 지우고, 다시 그리다 보면 마음속이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왠지 너무 작아 보였다. 다른 아이들의 꿈처럼 크고 반짝이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민들레 씨앗 하나가 바람을 타고 떠올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가볍게 날아갔다.
유진이는 그 씨앗을 오래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 천천히 올라왔다. 동네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었다. 퇴근길에 가끔 이 언덕을 지나곤 했다.
“유진아. 혼자 생각 중이었니?”
“네.”
사서 선생님은 유진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 언덕 아래로 마을 지붕들이 젖은 빛을 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선생님이었다.
“나는 원래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유진이가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정말요?”
“그래. 그런데 결국 되지는 못했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 지금은 사서로 지내고 있어. 나쁘지 않아. 책 가까이에 있고, 아이들도 만나고. 그래도 가끔은 생각해. 그때 내 마음이 정말 무엇을 원했는지, 내가 너무 빨리 잊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하고.”
유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도 아니고, 충고도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잠시 뒤, 선생님이 물었다.
“유진아, 너는 무엇을 원하니?”
유진이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있었지만, 막상 꺼내려니 작아 보였다. 정말 이런 걸 말해도 되는지, 순간 망설여졌다.
선생님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옛날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어. 예수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지.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유진이는 눈을 깜빡였다.
“눈이 안 보이면 당연히 고쳐 달라고 할 텐데요.”
선생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도 예수는 그 사람이 직접 말하게 하셨어. 다른 사람이 대신 정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결국 네가 말해야 하거든.”
바람이 살짝 불었다.
민들레 씨앗 몇 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유진이는 그 작은 씨앗들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떠나는 것들. 흔들리지만 멈추지는 않는 것들.
한참 뒤에야 유진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너무 작은 대답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곧바로 “좋다”거나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이 네 마음에서 나온 거구나.”
그 한마디에 유진이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 유진이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스케치북부터 꺼냈다.
오늘 언덕에서 본 것을 그리고 싶었다. 민들레 씨앗, 젖은 흙, 바람,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날아가던 작은 것들.
연필을 들고도 한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곧 첫 선을 그었다.
작은 언덕.
노란 민들레.
하늘 쪽으로 흩어지는 씨앗들.
유진이는 조용히 그림을 완성해 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날아가고 있는 것들을.
그림을 다 그리고 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정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적어도 자기 마음에서 나온 한 가지는 붙잡은 것 같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요?”
아이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유진이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유진이는?”
유진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친구들이 이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유진이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어제 언덕에서 이미 한 번 말한 것이었으니까.
첫 번째 고백이 가장 어려웠고, 두 번째는 조금 더 쉬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유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원하니.
그 질문은 한 번 대답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꾸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대답은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이는 이제 알았다.
그 대답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작아 보인다고 해서 진짜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디로 가는지 아직 몰라도,
날아가기는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