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3시 지구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온 남자가 다짜고짜 바닥에 구겨진 영수증을 집어 던진다. "어이, 순경. 니들이 이런 거 치우라고 내가 세금 내는 거잖아?" 쌍욕도, 폭행도 없다. 하지만 그 오만한 눈빛과 손가락질은 밤을 새운 신임 순경의 자존감을 순식간에 난도질한다.
장면이 바뀐다. 아침 9시, 강남의 번듯한 회의실. 최고급 슈트를 입은 팀장이 막내 사원의 기획안을 책상 위로 툭 던지며 비아냥거린다. "김 대리, 학교에서 이런 거 안 배웠어? 아, 거긴 안 가르치나?"
파출소 바닥의 구겨진 영수증과 회의실 책상 위로 내동댕이쳐진 결재판. 장소와 옷차림만 다를 뿐, 이 둘은 완벽하게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주취자'다.
권력이라는 독극물에 취한 자들
취객이 알코올에 전두엽이 마비되어 통제력을 잃었다면, 직장 상사는 '권력'과 '직급'이라는 달콤한 독극물에 이성과 공감 능력을 거세당한 상태다.
자신이 쥔 얄팍한 인사권과 지시 권한이 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면허증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비뚤어진 성취감에 취해 날뛰는 그 교만한 꼬락서니는 주취자의 행태와 소름 돋도록 일치한다.
강자 앞에서만 깨는 '선택적 만취'
이들의 가장 찌질하고 비열한 공통점은 철저하게 '선택적 만취'를 한다는 점이다. 파출소에서 눈을 부릅뜨던 취객도 체격이 압도적으로 큰 강력팀 베테랑 형사가 다가오면 기가 막히게 혀 꼬인 소리를 멈추고 얌전해진다.
직장 상사 역시 임원이나 주요 거래처 앞에서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자신에게 반항하기 힘든 부하 직원 앞에서는 통제 불능의 폭군으로 돌변한다. 이들은 결코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상대의 체급과 약점을 영악하게 계산하고 내지르는, 아주 이성적인 포식자일 뿐이다.
슈트 입은 주취자를 제압하는 서늘한 기록
파출소에서 취객의 무례함을 "술 먹고 그럴 수 있지"라며 넘겨주면, 그는 다음 날 더 큰 무례함을 들고 문을 걷어찬다. 직장도 똑같다. "원래 저런 분이야", "네가 참아"라며 조직이 묵인하는 순간, 가해자에게는 무언의 승인 도장이 찍힌다. 당신의 침묵은 주취자에게 술잔을 더 채워주는 행위다.
술에 취한 자에게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라는 감정적 호소는 먹잇감이 될 뿐이다. 필요한 것은 서늘하고 명확한 '폴리스라인'이다. 모욕의 순간을 감정 없이 건조하게 텍스트로 기록하라.
시간, 장소, 육하원칙이 담긴 그들의 부당함을 수집하는 흔들림 없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상대의 비뚤어진 권력 취기를 단번에 깨우는 가장 차가운 얼음물이 된다. 선을 넘는 자 앞에서는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감수성, 4대폭력 예방, 자살 예방 및 직장 내 장애인 인식 개선, 인권 예방, 리더십 코칭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그대는 늘 선물입니다'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