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분양계약서 한 줄이 건물 전체를 지배한다?
오피스텔이나 지식산업센터 분양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신 분들 중에는 이런 문구를 발견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분양자(시행사)가 지정하는 자가 관리인으로 임명되며, 분양자가 지정하는 관리회사와 관리 용역계약을 체결한다."
또는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분양자는 본 분양계약 제1항에 의한 관리인의 최초 임기를 사인할 때까지 10년으로 동의한다."
얼핏 보면 건물 준공 후의 관리를 위한 행정적 조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조항들은 실제로 집합건물 소유자들이 집합건물법상 당연히 누려야 할 자치(自治)권을 분양 단계에서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행사가 사실상 영구적으로 건물 관리를 장악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서울고등법원은 2025년 5월 13일,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결정을 내렸습니다(2025라2035).

법무법인 휘명 박휘영 대표변호사
사건의 개요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오피스텔(총 370개 전유부분, 구분소유자 312명)에서는 분양 당시부터 관리인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시행사(분양자)는 분양계약서 제14조에 "시행사가 지정하는 자가 관리인으로 임명되며, 시행사가 지정한 관리인의 최초 임기는 준공인가 시까지 10년으로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고, 별도의 건물관리동의서를 통해 관리규약 제정 권한까지 관리사무소에 위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A2라는 인물이 스스로 관리인이라 주장하며 관리단 사무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분소유자들은 기존 관리인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고 2024년 9월, 새로운 임시총회 소집을 청구하였습니다. A2는 이를 거부하였고, 소유자들은 법원에 관리단집회 소집허가를 신청하였습니다.
1심(서울동부지방법원)은 신청을 기각하였으나, 항고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뒤집고 집회 소집을 허가하였습니다.
결정의 핵심 법리
① 분양계약서의 관리인 지정 조항과 임기 조항 — 모두 무효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집합건물법) 제24조는 "관리인은 관리단집회의 결의로 선임하거나 해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강행규정입니다. 즉, 이 조항은 당사자 간 합의가 있더라도 달리 정할 수 없는 규정입니다.
시행사가 분양계약서에 삽입한 관리인 지정 조항은 구분소유자들이 스스로 민주적으로 관리인을 선출할 권리를 박탈하고, 시행사의 의사에 따라 관리인을 선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리인 임기를 '준공인가 시까지 10년'으로 정한 것은 구분소유자들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관리인을 교체할 수 없도록 한 것으로, 집합건물법상 강행규정에 정면으로 반합니다.
법원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법) 제6조, 제13조에도 해당하는 불공정한 약관 조항으로서 무효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고객(수분양자)에게 부당하게 불리하고, 의외 조항에 해당하며, 고객의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은 설령 계약서에 인쇄되어 있더라도 계약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건물관리동의서에 의한 관리규약 — 역시 무효
건물관리동의서를 통해 관리사무소에 관리규약 제정 권한을 위임한 것도 무효입니다. 집합건물법 제29조 제1항은 "규약의 설정·변경 및 폐지는 관리단집회에서 구분소유자의 4분의 3 이상 및 의결권의 4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서 한다"고 강행규정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리규약은 구분소유자 전체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제정해야 하는 것이지, 시행사나 관리사무소가 임의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③ 관리인 부존재 상태에서의 집회 소집 — 소유자 5분의 1이면 충분
이처럼 관리인이 적법하게 선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구분소유자의 5분의 1 이상이 관리단집회 소집을 원한다면, 관리인에 대한 청구나 법원의 허가 절차 없이 스스로 집회를 소집할 수 있습니다(집합건물법 제33조 제4항).
법원은 이러한 법리에 기반하여 구분소유자 312명 중 75명(5분의 1인 62.4명을 초과)이 소집 청구에 참여한 이상, 집회 소집허가를 인용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절차적 쟁점도 있었습니다. 항고인 중 41명은 소송대리권 수여 여부가 명확히 소명되지 않아 항고가 각하되었습니다. 법원이 소명 기회를 부여하였음에도 기한 내에 소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집단으로 진행되는 집합건물 관련 소송에서 소송위임장과 신분증 사본의 정확한 수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이 결정이 실무에서 갖는 의미
① '시행사 지정 관리인'이라는 구조는 더 이상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습니다
국내 비주거용 집합건물 분야에서는 시행사가 분양계약서에 관리인 지정 조항을 포함시키는 관행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이번 결정은 이러한 관행에 법적으로 명확한 제동을 걸었습니다. 비슷한 조항이 포함된 분양계약을 체결한 건물의 구분소유자들은 현재의 관리인 선임 구조 자체가 무효일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② 관리규약이 없거나 무효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관리규약이 없거나 무효인 상태에서는 집합건물법의 강행규정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관리인을 새로 선임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관리규약을 제정하는 과정 전체를 구분소유자들이 직접 진행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절차적 문제가 아니라 관리비 청구, 하자보수, 입주자 권리 행사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③ 기존 관리비 청구·계약의 유효성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무효인 관리인이 체결한 관리 용역계약, 청구한 관리비, 체결한 각종 서비스 계약의 법적 효력도 문제될 수 있습니다. 구분소유자들이 사후에 이를 추인하였는지 여부가 중요해집니다.
입법론적 관점에서의 제언
사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집합건물법이 분양 단계에서의 소유자 보호를 충분히 규율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습니다.
현행 집합건물법 제9조의3은 분양자가 최초 관리단집회 소집 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으나, 분양계약서에 강행규정에 반하는 관리인 지정 조항이나 임기 조항을 삽입하는 것 자체를 사전에 금지하는 명시적 규정은 없습니다. 이미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 소유자들이 법원을 통해 다퉈야 하는 구조이다 보니, 시간과 비용 면에서 소유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부담이 지나치게 큽니다.
분양계약서 표준약관에 강행규정 위반 조항 삽입을 금지하는 조항을 명시하고, 위반 시 분양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사전 예방적 규제 장치를 마련하는 입법이 시급합니다.
마치며
"분양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앞으로 10년간 관리는 우리가 합니다." 이것이 많은 비주거용 집합건물에서 시행사가 사실상 관철시켜 온 구조였습니다.
이번 서울고등법원 결정은 그 구조가 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집합건물은 그 건물에 재산을 투자하고 이해관계를 가진 구분소유자들이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시행사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분양계약 조항이 그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은, 법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식산업센터, 오피스텔, 생활형숙박시설을 분양받으셨거나 현재 관리 문제로 갈등을 겪고 계신 구분소유자들이라면, 분양계약서상의 관리인 관련 조항을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