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 이어 십계명을 조금 더 말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벗어나자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행군하던 이스라엘을 산 아래 멈추어 세웠습니다. 그 후 모세를 산 위로 올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며 구름 띠가 산허리를 둘러 감쌌습니다. 자연스레 산 위와 아래가 구분되었습니다. 산 위에는 하나님과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사십 주야를 보냈습니다. 과연 모세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모두를 예배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함이 최우선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현존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써주신 돌비를 받았습니다. 이름하여 십계명이라 말하는 그 돌비입니다.
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계명이 새겨진 돌비를 주셨습니까? 그 돌비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돌비를 잘 간직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돌비에 기록된 계명대로 살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기록된 계명대로 살라는 말씀 아닙니까? 왜냐면 그 계명들이 하나님과 맺으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명이 기록된 돌비는 공개된 언약 문서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언약 문서를 모세는 깨뜨려버렸습니다(출 32:19).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도 전에 그렇게 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랬습니다. 언약 문서를 읽고 공증해야 하는데 파괴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그럴 수 있습니까? 모세가 취한 그 과격한 행동이 누구에게는 숙제처럼 보입니다.
대장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산에 멈추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하나님에게서 돌비를 다시 받아옵니다. 계명을 백성에게 반포하고 "아멘", 화답하며 언약백성이 됩니다. 그날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은 특별한 말씀이 됩니다. 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말씀이란 뜻입니다.
자, 그러니 출애굽기 주제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출애굽기 주제는 구원입니까, 예배입니까? 공교롭게도 출애굽기 책명 탓에 언뜻 구원을 강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를 곱씹어 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레 "구원 그 후"에 눈길이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언약백성에게 구원 그 후란 어떤 의미입니까? 거룩한 삶, 곧 끊임없이 풀어가야 할 성결이 과제가 됩니다.
그 거룩한 삶을 가장 찰지게 드러내는 상황이 예배입니다. 언제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실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연습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말 유명한 문구 아닙니까? 햄릿이 남긴 이 독백이야말로 살아있는 예배를 정의한다고 봅니다. 모름지기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거룩한 결단이 예배인데, 우리는 그 상황을 자주 놓칩니다. 어느새 예배는 화려함과 웅장함만 찾는 의식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준 처음 예배도 그랬습니다(출 32:1-6). 아론은 짜낼 수 있는 모든 헌신을 모아 화려함을 극대화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예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예배가 어떻게 예배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거짓 예배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 현존과 맞물려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을 출애굽기 모형론 관점으로 살펴봅니다. 그들은 손쉽게 구원이 중심 주제라며 힘주어 말합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주제가 과연 구원인가를 되물었다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요한복음 중심 주제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행여 이 말을 오해할까 봐 다시 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구원 말고도 중심 주제가 또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남은 과제, 곧 예배입니다. 출애굽기는 구원과 예배를 중심 주제로 담아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도 구원과 예배가 중심 주제입니다.
이처럼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은 닮은꼴이 많습니다. 그래서 진지한 요한복음 이해는 출애굽기를 전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를 모르고 요한복음에 뛰어들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구원과 예배를 담은 출애굽기가 정말 귀하지 않습니까?
자, 어쨌든 출애굽기 중심 주제가 구원과 예배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모세를 말하면서 약속과 소명을 간단히 말했습니다. 약속은 둘인데 소명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를 조금 비틀어 달리 질문해 보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소명은 출애굽기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그 의미를 추적하면 예배는 필연 구원을 전제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예배라면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러니 예배는 결국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광야 생활 사십 년을 잘 살펴보십시오. 모세는 그 시간 모두를 이스라엘 백성을 예배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는 그런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를 나온 백성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는 몇 사람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달랑 두 사람뿐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정 60만 명이 넘는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어떤 이는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 2백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모세는 성공한 목회자라 말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이런 질문이 놓친 대목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에게 주신 소명을 간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질문입니다. 만일 모세 소명을 기억한다면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모세 소명은 구원과 예배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세 흠집 내기라면 모를까 이런 질문은 곤란합니다.
요즘 목회 현장이 매우 살벌해졌습니다. 그래선지 꿩 잡는 게 매라고, 신학 없는 목회가 늘어갑니다. 교회인지 사교장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정당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구원과 구원 그 후, 곧 예배가 생명줄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선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