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슬람 최대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Kaaba) 신전으로 전 세계 하지(Hajj) 예비 순례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특히, 무슬림 순례자들이 카바 신전 주변을 도는 '타와프' 의식을 행하며 인파가 급증하고 있다. 지구촌 온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2026년의 한가운데,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땅은 또 다른 의미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르고 있다.
세계지도를 펼치면, 두 점이 영혼의 빛으로 깜빡인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와 이스라엘 예루살렘. 한쪽으로는 매년 흰 천을 두른 무슬림 수백만 명이 모여든다. 다른 한쪽으로는 예수의 발자취를 더듬는 그리스도인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 도시는 같은 사막 지역에 있지만, 두 발걸음이 향하는 신학적 좌표는 우주처럼 떨어져 있다. 같은 사막 하늘 아래 같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면서도, 두 종교의 성지순례는 전혀 다른 영혼의 문법을 가진다.
전 세계 무슬림들의 영적 고향인 카바(Kaaba) 신전 앞 광장에는 핫즈(Hajj) 순례를 앞두고 평생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모여든 예비 순례자들의 거대한 물결이 일렁인다. 이슬람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핫즈'는 재정적, 신체적 능력이 되는 무슬림이라면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행해야 하는 가장 신성한 예식이다.
올해 '핫즈'는 매년 초승달 관측에 따른 이슬람력 12월 8일에서 12일 사이에 치러지는데, 올해는 5월 24일(일요일) 저녁부터 5월 29일(금요일) 저녁까지 약 6일간 진행된다. 무슬림 순례자들은 메카 외곽의 미카트에서 이흐람(Ihram)이라는 흰 천을 두른다. 남성은 솔기 없는 두 폭의 면천을 허리와 어깨에 감싼다. 여성은 단정한 자신의 옷을 입는다. 그 순간부터 부와 신분은 사라진다. 이 흰 천은 동시에 수의(壽衣)의 상징이기도 하다. 죽음의 자리에서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미리 선언하는 의식이다. 이어 마스지드 알 하람의 카바(Kaaba)를 반시계 방향으로 일곱 바퀴 도는 타와프(Tawaf)가 행해진다. 그다음 사파와 마르와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오가는 사이(Saʿy)가 이어진다. 이는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이 광야에서 아들을 살리려 물을 찾아 헤맨 발걸음을 기리는 의식이다. 9일에는 아라파트 평원에 모여 정오부터 일몰까지 서서 기도한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핫즈는 곧 아라파트이다"라는 말로 그 자리의 중심성을 못 박았다. 이후 무즈달리파에서 작은 돌을 모아, 미나의 자마라트(Jamarat) 세 기둥을 향해 던진다. 이브라힘이 아들을 바치려 할 때 사탄의 유혹을 거절한 그 자리를 재현하는 행위이다. 의식의 마지막에는 가축을 잡는 희생제,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가 따른다. 절정에 다다른 순례자에게는 "어머니가 그를 낳던 날과 같이 죄 없이 새로워진다"라는 하디스의 약속이 주어진다. 메카는 무슬림에게 단순한 기념지가 아니다. 죄의 무게를 내려놓는 영적 정화소이며 신 앞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통로로 인식된다.
반면, 기독교의 성지순례는 매우 다른 자리에서 출발한다. 신약 어디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느 장소에 가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신 본문이 없다. 그런데도 4세기에 들어서며 거대한 흐름이 일어났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326년경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한 사건이 그 출발점이다. 그녀는 예수의 십자가 자리로 전해지던 곳에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모태가 되는 예배당을 세우게 하였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교회, 감람산의 승천 예배당도 그 시기에 모습을 갖추었다. 예루살렘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이 모이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중세에 이르러 성지순례는 유럽 신앙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더해 로마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3대 순례지로 자리매김했다. 십자가의 길 14처 묵상,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1,000km의 도보 행렬, 갈멜산의 영성 수련. 모두 그 시대 영혼의 갈증이 그려낸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면벌부(免罰符), 유물 숭배, 성지 입장료의 거래라는 그늘도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룩한 발걸음이 어느덧 영적 거래의 통로가 되어가던 시기였다.
이 흐름에 결정적으로 칼을 댄 사건이 16세기 종교개혁이다. 마르틴 루터, 장 칼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성지순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신앙을 단호히 거부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 갇히지 않으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받으시는 분이시다"라는 취지의 가르침을 거듭 강조했다. 그 신학의 뿌리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한복음 4장 21절, 현대인의 성경). 이어지는 23절은 결정적이다. "참된 예배자들은 영적인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바로 이때이다." 장소가 거룩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장소를 다시 정의한다.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의 출발점이 바로 이 자리이다.
두 종교의 성지순례는 외형에서 닮은 듯하나, 그 내부 신학의 골격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이슬람의 핫즈는 의무이고 죄 사함의 통로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무슬림 순례자에게 메카는 죄의 무게를 내려놓는 영적 정화소이다. 반면,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에서 예루살렘 방문은 의무가 아니다. 평생 그 땅을 밟지 않더라도 구원에 어떤 결손도 발생하지 않는다. 골고다의 바위, 갈릴리의 물결, 감람산의 정원 무덤. 그곳을 다녀온 그리스도인은 깊은 감격을 얻을 수는 있어도, 죄 사함을 별도로 더 얻는 것은 아니다. 죄 사함은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만 주어진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단호한 고백이다. 히브리서 9장 12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피로 단번에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가시어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현대인의 성경)라고 선포한다. 거기에 더해질 의식은 없다.
이 차이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거룩의 위치'에 대한 이해의 다름이 있다. 이슬람은 카바와 메카를 거룩한 영역으로 본다. 비무슬림의 출입조차 금지되는 신성 구역이다. 그러나 신약은 거룩이 장소에서 인격으로 옮겨졌다고 선언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가리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요 2:19)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돌과 흙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과 연합된 신자의 몸 또한 "성령의 전"이라 불린다(고전 6:19). 거룩이 장소에서 사람으로, 의식에서 관계로, 의무에서 사랑의 응답으로 옮겨졌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혁명이다.
중동에서 만난 한 무슬림 회심자는 내게 이렇게 고백했다. "메카를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그날, 처음으로 짐이 어깨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렇다. 거룩한 곳을 찾아가는 인간의 발걸음이 아니라, 거룩한 분이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 그 사건이 복음의 중심이다.
이슬람권에서 보낸 세월 동안, 메카로 향하는 무슬림 형제들의 눈빛을 가까이 보아 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거짓되지 않다. 신을 향한 갈망은 진실하며, 죄의 무게를 벗어 두고 싶은 영혼의 떨림은 깊고 진하다. 한 인간이 신 앞에서 자신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 그 마음. 그것은 어느 종교에서도 거룩한 갈망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길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사막의 흰 천을 두르고 카바를 일곱 바퀴 도는 발걸음의 끝에서, 인간은 끝내 자신의 의(義)에 도달할 수 있는가. 내가 만나 온 가장 깊은 평화를 누리는 신앙의 사람들은, 발걸음으로 신을 찾아낸 이들이 아니었다. 한 인격이 자신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만나, 자기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었다.
성지란 무엇인가. 그곳은 더 이상 흙과 돌의 지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모든 자리, 한 영혼이 그분과 만나는 모든 자리가 성지이다. 골고다의 바위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흘리신 보혈이 거룩하다. 갈릴리의 물결이 거룩한 게 아니라, 그 위를 걸으셨던 분이 거룩하다. 그리고 그 보혈과 그분은 지금 이 시각, 내가 글을 쓰는 이 책상 곁에도 동일하게 머무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