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 외교의 무대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나라다. 침묵으로 협상하고, 뒷문에서 판을 짜는 데 능한 왕국이다. 그런 리야드가 형제국이자 후견인인 미국을 향해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 아닌 '항의 각서'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을 둘러싸고 외교적 불쾌감을 공식 문서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사막의 거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면, 그 침묵의 무게만큼이나 사태는 무겁다는 뜻이다. 무엇이 리야드의 인내를 끊어 놓았는가.
이야기의 출발점은 2026년 3월 2일이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에 대규모 공습을 퍼부으며 여러 마을을 점령했다. 레바논 정부는 이 와중에 피란민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미국이 중재에 나서 4월 중순 임시 휴전이 발효됐고, 이후 연장이 거듭됐다. 그러나 '휴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이스라엘군의 포화는 남부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우디의 분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터져 나왔다. 리야드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작전을 '혼란스럽고 무계획적'이라고 규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명한 출구 전략도 없이 전선만 넓혀 가는 군사 행동이, 어렵사리 다져 온 지역의 안정을 송두리째 흔든다고 본 것이다. 협상으로 불씨를 끄려는 쪽과, 불씨를 키워 판을 흔들려는 쪽. 그 충돌의 최전선에 레바논이 놓였다.
이번 보도의 진원지는 이스라엘 공영방송 KAN이다. 튀르키예 매체 CNN 튀르크가 아나돌루 통신(AA)을 인용해 전한 바에 따르면, 리야드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에서 느낀 불편함을 외교 경로로 트럼프 행정부에 전달하며 항의 각서를 건넸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매체발(發) 주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사우디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인물은 따로 있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다. 사우디 당국은 그가 레바논의 전장을 의도적으로 넓혀, 가라앉던 걸프 지역의 전쟁을 다시 불붙이고, 워싱턴과 테헤란 사이에서 무르익던 화해의 토대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을 짚자면 이렇다. 사우디는 헤즈볼라의 힘을 빼되, 레바논이라는 국가 자체는 일으켜 세우려 한다. 무장 세력의 무릎은 꿇리고 국가의 등은 펴 주겠다는 셈법이다.
리야드의 손길은 이미 레바논 내부 깊숙이 들어가 있다. 그 지렛대가 헤즈볼라의 시아파 동맹이자 레바논 국회의장인 나비흐 베리다. 로이터와 복수의 아랍권 매체는 사우디 외교장관 파이살 빈 파르한 왕자가 베리와 직접 접촉하고 두 차례 장시간 회동했다고 전했다. 시아 공동체 안에서 베리가 쥔 영향력을 끌어안아, 협상장 밖으로 이탈하려는 흐름을 붙들겠다는 포석이다.
한편, 사우디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공식 외교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이란 휴전의 대가로 역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압박해 왔다.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의 확대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 한, 그 청구서에 선뜻 서명할 아랍 지도자는 많지 않다. 6월 1일 사우디 외교부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강도 높게 규탄하는 성명을 냈고, 6월 3일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포괄적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조건은 헤즈볼라가 공격을 전면 중단하고 모든 병력을 리타니강 이남에서 철수하는 것이었다. 헤즈볼라는 이 조건부 휴전을 거부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3월 2일 이후 공격으로 3천66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