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이 자랑하는 포탈사이트는 百度(baidu)로써, 신화통신과 함께 중국 당국의 공식의견을 대변한다. 그 百度에서 최치원기념관을 검색하면 위치를 비롯한 매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중국 강소성 양주(揚州, 우리나라 양주는 볕 陽자 陽州)시에 위치한 당성유적박물관 동부구역에는, 중국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최치원(857~908 이후 언제)을 영구히 기념·연구·전시하기 위한 기반으로 건립되었다.”며, 200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사 권46에도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12세에 당나라 장안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에서 16년간 머물렀으며, 특히 양저우는 그의 가장 큰 성취를 거둔 곳이자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반란군의 괴수 황소를 타도하는 최치원 격문을 읽고 충격을 받아 그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우화가 엄청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그 討黃巢檄文이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에 담겨 전해지고 있지만, 중국에는 막상 그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혁혁한 업적을 남겼더라도 12살에 입당하여 17살에 과거급제를 하지만 28살에 귀국하였으니, 당나라 체류기간은 16년에 불과하고, 활동기간은 11년에 불과하다. 그러한 최치원에게 기념관을 세워 기념할 만큼 기억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일본 스님 여행기에 등장하는 별스러운 단어
일본 스님이 불법을 구하고자 당나라에 들어가 9년간(837~847) 여행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그런데 그 여행기가 발굴되고 유명해진 경위를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당나라를 다녀오고 나서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883년 처음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개운치 않다. 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는 라이샤워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묶어서 ‘세계 3대 기행문’이라고 극찬하였다는 대목도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사실은 1883년이라면 일본이 이미 제국주의가 본격화되는 시기와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내용은 더욱 황당하다. 이 세상 어떤 다른 역사서에도 ‘신라방(新羅坊)’은 없다.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명칭이다. ‘방(坊)’이라 하면 동네, 마을 정도라고 볼 수 있고, 이 여행기에는 수없이 많은 ‘신라방’이 등장하는데, 오히려 당나라의 ‘방’ 이야기는 볼 수 없으며, 남의 나라인 당나라에 그렇게 많을 수 있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내용 상으로는 구법의 목적지가 ‘오대산’일 듯하다. 그 위도는 북경과 위도가 비슷하다. 따라서 일본열도보다 훨씬 위도가 남쪽인 양주(揚州, 바로 위 최치원기념관이 있는 그곳)로 들어가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귀국할 때는 산동성에서 우리나라 서해안을 스쳐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당으로 입국할 때 양주로 갔다는 사실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고구리, 백제, 신라 삼국 영역의 수수께끼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은 삼국이 이 반도의 좁은 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살아왔다고 가르치는 역사교과서로 국사를 배웠기 때문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역사교과서의 많은 구절을 의심하며 교과서를 믿을 수 없다고, 역사과목을 외면하였다. 불행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의 상실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새로운 문명을 일군 적도 없이 늘 외지에서 개발된 문명의 끝자락에서 떡고물이나 얻어먹고 살며, 툭하면 침략이나 당하며(일설에 9백 몇 번이라나?) 살았다니 조상국가에 관한 자부심이 뿌리째 뽑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지 않았다. 표지도 그렇지만 임금에 올리는 발행 보고서에 ‘삼국사’로 되어 있다.)의 고구리(麗는 아름답다는 뜻이면 ‘려’, 나라이름이라면 ‘리’로 읽는다. ‘옛날 옛날 고리쩍에’ 하던 그 고리가 고구리이다.)가 수와 당을 물리칠 때, 백만을 헤아리는 군사를 상대하였다고 하였다. 물론 수서와 당서도 내용이 같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군사와 교통수단이라고는 마차뿐이었을 터인데 전쟁물자를 어떻게 수송하였을 것인가? 625전쟁 때 경험으로 반추하여도 이 땅이 100만의 군사를 동원하는 적국의 전쟁터가 될 수 없을 터이다.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인 사서를 무시하는 국사학계
삼국사(50권)에는 유명한 조상들의 전기가 10권에 걸쳐 실려있다. 그 가운데 권46에는 최치원의 전기가 있다. 그 가운데 ‘상대사시중장’이라는 당나라의 대사시중이라는 직위의 관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사람의 허를 찌른다. 소위 식민사학의 앞잡이라는 이병도가 번역한 내용을 옮겨보겠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으며,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하였을 때에는 강병 100만 명이어서 남으로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북중국의) 유, 연, 제, 노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으며, 수황제의 실세(失勢, 망하였다는 뜻;필자의 주)는 저 요동정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
생각하여 보시라.
남으로 오월을 치고 북으로 유연제로를 치는 어마어마한 전쟁을 하는데 100만의 군사를 이 땅에서 동원하여, 그것도 바다를 건너가 전쟁할 수 있겠는가? 이성계 조선의 초기 인구가 100만, 임진왜란 때 인구가 5백만이라는 연구를 생각하면 더욱 이상하다.
앞의 인용문을 언급하고 있는 최치원의 신라는 그 중간위치에 있었길래 ‘남으로는’, ‘북으로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즉 신라는 오월과 유연제로 사이 중간쯤에 있었다는 웅변이다. 오와 월나라, 유연제로가 이 땅에 없다면 그 사건의 현장은 어디가 될 것인가?
설마 그 어마어마한 전쟁을 치른 뒤 땅을 반납하고 퇴각하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을까? 침략하고 흔들어 망하게 만들고 그 땅을 차지하였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원래부터 그 땅에 존재하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 사고일 것이다.
굳이 한반도만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
신라 9대 벌휴이사금 10년(서기 193년) 6월 왜인이 큰 기근으로,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신라 41대 헌덕왕 8년(서기 816년) 흉년과 기근으로 당의 절동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왜가 현재 일본 열도에 있었다면, 왜인이 밥을 얻어먹으러 무려 천여 명이 현해탄을 건너올 수 있겠는가? 경상도에 있는 신라라면 170명이 굳이 배까지 타고 그 먼 대륙의 당나라로 걸식할 갈 수 있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신라를 사이에 두고 당과 왜가 이쪽저쪽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와 같은 기록을 전혀 말하지 않는 역사학계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냉정하고 합리적 시각을 갖고 우리나라 옛 사서를 보면 우리의 조상국가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였던지 자부심이 뭉쿨뭉쿨 솟아 오를 것이다. ‘우리역사와 땅’은 국민의 자부심 고양을 위하여 국사교과서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지원을 부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