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독교계에 깊이 있는 신학적 담론을 제시하고 있는 장재형 목사가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에 대한 심층 강해를 통해,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을 역설했다. 장 목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단순한 개인의 윤리적 덕목 목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일한 뿌리에서 파생된 유기적 총체임을 천명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필연적으로 율법주의적 정죄와 시기심을 극복하고, 범죄한 형제를 온유함으로 회복시키며 서로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하며, 개인의 경건을 넘어 관계적 영성으로 나아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장 목사의 이번 강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역설한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를 현대적 언어와 신학적 통찰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서 벗어나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다른
복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바울은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하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변증해야 했다. 장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의 열매가 율법의
조문들을 기계적으로 지키려는 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원리임을 명확히
했다.
장 목사는 강해의 서두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나열된 아홉 가지 열매의 첫 단추이자
모든 것의 근원인 ‘사랑’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세상이 노래하는 사랑, 즉 조건적이고 감정적이며 유한한 사랑(에로스, 필리아)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명확히 구분했다. 장 목사는 “아가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정의하며, 그 원형이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에 압축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 사랑의 본질을 히브리적 사유의 핵심인 ‘안다(yādaʿ, 야다)’는 개념을 통해 더욱
심도 있게 조명했다. 헬라 철학이 지식(그노시스)을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앎으로 이해한 반면,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인격적이며 언약적인 깊은 관계, 즉 경험과 순종이 수반되는 체휼적 앎을 의미한다. 장 목사는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아는 것”이라며 “아담이
하와를 ‘알고’ 생명을 잉태했듯,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성품을 온전히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통찰은 고린도전서 13장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바울의
고백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게 한다. 장 목사에 따르면, 이는
종말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그 깊고 완전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 또한 그분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표현이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곧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그 사랑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 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이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차마 ‘아가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필로 세)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한다. 장 목사는 “이는 자신의 세 번의 부인으로 사랑의
실패를 처절하게 경험한 베드로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아심’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겸손의 고백”이라고 해석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인간적 결단이나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먼저 아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제적인 은총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의 본질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그 사랑을
경험할 때 가장 깊은 내적 충만함과 기쁨(희락)을 누리도록
설계되었다고 가르쳤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기쁨은 바로 앞 절에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분리될
수 없다. 장 목사는 “인간 실존의 근원적 고통과 괴로움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 즉 관계의 단절에서 온다”며 “따라서 성령의 두 번째 열매인 희락은 세상이 주는 찰나적 쾌락이나 긍정적 사고방식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거할 때 샘솟는 영적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이어서 제시되는 ‘화평’은 구약의 ‘샬롬’ 개념에
뿌리를 둔 것으로, 단순한 갈등의 부재가 아닌 온전함, 번영, 그리고 하나님 및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장 목사는 바울
서신의 서두에 “은혜와 평강”이 관용구처럼 등장하는 것은
신학적 필연성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인 은혜가 선행될 때 비로소 참된 평강이 결과로 따라온다”며, 이
평강의 핵심을 ‘하나님과의 화목’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정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장 목사는 이러한 내적 평안이 마음에
‘여유(room)’를 만들어내며, 이는 자연스럽게 ‘오래 참음’이라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바울이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한 것을 예로 들며,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은 마음을 좁고 각박하게 만들어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은혜를 체험한 심령은 너그러워져
타인의 허물을 인내하며 기다려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랑에서 발현하여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으로 이어지는 성품은 다시 자비(남에게 베푸는 적극적 친절), 양선(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는 도덕적 실천), 충성(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함), 온유(자신의 힘을 통제하여 타인을 섬기는 성숙함), 그리고 절제(자기 욕망을 다스리는 능력)라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 확장된다. 장 목사는 바울이 아홉 열매를
나열한 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선언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인간이 만든 어떤 율법이나 규범으로도 판단하거나 제재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원리임을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은 필연적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는 바울의 권면으로 귀결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시기 질투의 죄가 인류의 원죄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창세기 강해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했다. 그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죄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즉 유한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도전하는 ‘수직적 죄’의 원형이라면, 4장에 나타난 가인의 죄는 동생 아벨이 받은 축복을
기뻐하지 못하고 그를 살해한 ‘시기 질투’,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수평적 죄’의 뿌리라고 진단했다.
장 목사는 이사야 14장의
계명성의 타락 기사,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교만의 본질이 바로 자기 높임의 욕망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수직적 교만이 내면에 자리 잡을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수평적
관계에서 타인의 성공이나 은혜를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가인이 겸손했다면 동생의 제물이 열납된 것을 함께 기뻐하며 그 비결을 배우려 했을 것이지만, 교만은 그의 눈을 멀게 하여 형제를 죽음으로 내모는 어리석음을 낳았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투기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서로의 행위를 비교하고 경쟁하며, 누가 더
영적인가를 다투는 영적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장 목사는 통찰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이처럼 자기 의를 내세우고 타인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조화롭게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삶이다.
장 목사는 이 논의를 갈라디아서 6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관계의
회복’과 ‘상호 책임’으로
요약했다. 신앙은 관념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그 첫 번째 실천의 장이 바로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여기서 장 목사는 ‘신령한
너희’라는 바울의 호칭이 가진 목회적 지혜에 주목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기에 앞서, 성령을 받은 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며 격려하는 바울의 온유한
성품을 보여준다. 율법주의는 죄와 벌의 도식에 따라 범죄한 자를 즉각적으로 정죄하고 찌르지만, 복음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잡는’ 것이다. ‘바로잡는다’는 헬라어는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거나 탈골된 뼈를 맞출
때 사용하는 단어로, 파괴가 아닌 치유와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섬세한 과정을 의미한다.
‘온유’는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한 것’과 나란히 언급되는 겸손과 맞닿아 있으며, 이는 타인의 죄를 다룰 때 자신 역시 동일한 시험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태도라고 장 목사는
설명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의 경고처럼, 타인의 실패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이 회복의 첫걸음이다.
장 목사는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율법을 앞세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돌로 치려 했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위선적인 의를 해체시키셨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씨가 무엇이었든, 그 행위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창조주의 법, 즉 용서와 긍휼의 법이 있음을 상징한다고 장 목사는 해석했다.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을 때, 이는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정죄가 아닌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복음의 방식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러한 용서의 원리는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장 목사는 일만 달란트가 한 개인이 수십만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임을 강조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진 죄의 빚의 크기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이처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전액 탕감받았다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무한한 용서를 경험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노동자의 약 석 달치 품삯,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액수) 빚진 동료를 용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마땅한 의무가 된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주님의 경고는, 용서가 구원의 조건은
아닐지라도,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증거임을 보여준다. 장 목사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조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서 저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주신 그 엄청난 은혜를 기억하며, 저 또한 저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를 용서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이자 고백이라고 가르쳤다.
반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이러한 은혜를 망각한 율법주의자의 자기 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종교적 행위(금식, 십일조)를 내세우며 타인을 멸시했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의
결론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한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모든 시도가 헛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는 겸손한 심령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장 목사는 역설했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은 이 모든 논의의 정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짐’이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했다. 첫째는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을 때의 ‘죄와 인생의 무거운 짐(바로스)’이다. 이 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져주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 남의 죄를 정죄하는 대신 그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그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 정신을 본받아 서로의 짐을 지는 삶의 시작이다.
둘째 짐은 5절의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각자의 책임 분량으로서의 짐(포르티온)’이다. 이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양심과 책임에 대해
직접 응답해야 할 영역이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상호 책임과 개인의 책임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가르쳐준다고
장 목사는 덧붙였다.
바울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고
경고한 것처럼, 율법주의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복음 안에서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의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하며,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도상의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이처럼 우리를 자기 의와 정죄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며,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우리를 강력하게 초대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영적 성장을 넘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