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본 영화 '어쩔수가 없다'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들은 단어는 백세 시대라는 말이었다. 이아라(염혜란 분)가 구범모(이성민 분)에게 제지공장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라며 건네는 말이었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는 주인공 만수가 면접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살인을 선택하고, 마침내 제지공장 취업에 성공하는 과정을 다룬다. 아이러니 하게도 만수는 로봇이 모든 일을 대체해 결국 종이와는 큰 상관없는 태블릿 PC로 공장 불을 끄는 사람이 된다. 25년 제지공장 전문성을 살리려 들어온 만수에게 꽤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었겠지만, 그는 결국 불안정한 미래 앞에서 감지덕지하며 순응한다.
최근 들어 언론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주도적인 능력(agency)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공상과학소설로 치부되던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며, 내가 기계에 대체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곧잘 교육계로 그 화살을 돌리곤 하는데, 새롭게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한국교육은 잘 하고 있는지 묻곤 한다. 교육이 바뀌면 우리가 이 고용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안타깝지만, 이 질문에 답하며 사회가 내놓는 해결책도 마땅치가 않다. 여기에 대한 교육계의 반응은 가장 먼저, AI나 코딩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넣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고등학교 내에 많은 교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두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택하고 진로를 설계하도록 하는 교육과정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대학교, 평생교육기관, 재취업기관에 파이썬 기초, 심화 강좌가 열린다. 물론 이런 교육정책이 아직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정말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게 이게 전부일까.
예컨대, 극중 만수가 파이썬을 배웠다면 계속 회사에 남아있었을까. 어렸을 적 원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진로를 설계했다면 계속 일자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것에서 결코 밀리지 않을까.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면 정말 백세 시대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AI 시대에 맞추어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날부터 지금까지 십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임머신이 없는 이상, 지금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된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뭔가는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여러 프로그램이 학교에 밀고 들어올 때, 많은 교사가 회의감에 젖는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고 있다. 이 변화가 정말 아이를 위한 변화인가 하는 회의감이다. 교사가 품는 그 회의감은 학생에게도 있다. 나 역시 그 변화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코딩 수업이 들어오고, 자기주도적 인재 전형이 증가하고, 대학교에서 다시 필수로 지정된 코딩 교양수업을 들었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겪은 나는 백세 시대에 준비된 인재일까.
영화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우리 사회에는 암묵적인 정년이 있고, 기업의 구조조정이 있고, 갑자기 사오십대에 자리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그 시기를 잘 견딜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예컨대,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의 이중 노동시장 속에서, 괜찮은 일자리는 매우 적기에, 중장년층이 다시 취직하기란 어렵다. 특히 여성은 차별적인 노동시장의 문제는 물론, 오랜 경력단절의 여파로 재취업의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특정 분야에 우수한 전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를 쉽게 대체하는 AI의 급속한 발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2-30년 뒤 정말 우리는 이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손 안에 든 도구상자를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전반으로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망치만 들고 있어서 모든 문제를 못으로 본다는 격언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괜찮은 일자리의 문제, 계층이동의 문제, AI의 발전 등은 모든 제도가 다루어야 함에도 많은 언론은 주로 교육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오히려 시민사회가 상상력을 키워서 좋은 스타트업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토양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이상적인 사회보장제도는 어떤 모습인지, 여성의 높은 재취업 장벽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을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가 정말 백세시대를 준비하는 사회가 아닐까.
나와 내 친구들은 매스컴에서 논의되는 AI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야 할 첫 세대가 될 것이다. 시시각각 바뀌는 취업전선에 이미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의 모습은 이 전환기가 성큼 다가왔음을 직감하게 한다. 나는 비록 우리나라가 교육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는 산업화 시기의 특수한 조건들이 맞물렸기에 가능했으며, 교육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교육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어떤 사회제도와 노동 환경을 설계해야 할지 질문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때 비로소 교육도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K People Focus 아사달97 칼럼니스트
대화하는 개인주의를 공부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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