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아무도 믿지 않던 1980년대, 그 외로운 출발
1980년대, 나는 "신라가 두 개였다"고 주장했다. 당연한 듯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학자도, 지인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삼국사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역사 전문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자녀들에게 물려줄 만한 제대로 된 역사 자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시작하였다. 서점과 도서관을 오가며 역사책을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책이 비슷하였다. 같은 내용을, 같은 시각으로, 같은 결론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명적 발견 - 삼국사(기) 권46의 충격
전환점은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을 읽던 순간 찾아왔다.
"고리**(高麗,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에 강병 100만으로 남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노하고, 북으로는 유(幽)·연(燕)·제(齊)·로(魯)를 경략하였다."
이 한 구절이 나의 40년 연구를 결정지었다.
- * 김부식은 고리사에서 '삼국사'를 지어올렸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일본인이 1908년 삼국사 50권을 1책으로 출판하며 처음 사용한 왜곡된 서명이다. 국보로 지정된 원본 표지도 당연하게 '삼국사'로 되어 있음을 국가유산청 인터넷사이트에서 항상 확인할 수 있다.
- ** '고리'는 일본인들 때문에 잘못 읽힌 고려의 올바른 발음이다. 여기에서는 고구리를 말한다. '麗(려)'는 일반적으로 '려'로 읽지만, 나라 이름을 말할 때는 '리'로 읽었다. 그래서 '고리'이고, 외국인이 우리를 Korea(코리아)라고 하는 이유인데, a는 땅 또는 나라를 뜻하는 어미로 곧잘 쓰인다.
핵심은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경략하였다'는 부분이다.
오(吳)와 월(越)은 어디인가? 현재 절강성과 복건성이 아니다. 오왕 부차의 보검이 발굴된 호남성과 호북성이다. 현재 중국 경제가 가장 발달한 양자강 유역, 절강성, 복건성 등을 아우르는 지역이 결코 오와 월이 아니다.
유(幽)·연(燕)·제(齊)·로(魯)는 어디인가? 이 또한 잘못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북경 일대부터 산동반도를 아우르는 화북 지역이다. (더 연구하면 산서성 지역이 된다.)
그렇다면 이 기록을 쓴 최치원의 신라는 그 중간에 존재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북으로 중국 대륙의 핵심 지역을 장악했고, 신라는 그 사이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구리와 백제가 정벌하지 않은 곳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걸친 지역, 그리고 사천성 일대뿐이었다. 현재 중국의 경제 중심지 대부분이 우리 선조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흥분된 마음으로 필자는 이 내용을 글로 정리해 일간지에 기고했다. “최치원은 ‘조선팔도 사람’이 아니다”는 제목이었다. 당시 문화부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 글을 역사학 교수들에게 싸인을 받아오면 실어주겠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기득권 학계 전체와 맞서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진실은 천 년이 지나도 진실이어야 하니까.
삼국사와 동이전, 그리고 '조선팔도'라는 족쇄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놀란 사실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조선 팔도에 맞추려는 연구였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기록으로 이 땅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면 그 연구의 결과가 잘못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와, 그 삼국사의 기사를 조금이나마 검증할 수 있는 소위 중국인(중국은 중화민국으로써 1912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세운 나라일 뿐. 현재는 공산당이 정부 위에 군림하여 최고 권력의 실체가 중국공산당에 있으므로 중공이 옳을 듯)들의 25사 동이전이 있다. 그 가운데
삼국사 권46과 남제서 권58이 같은 내용임을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 또 삼국사의 전편에 흐르는 내용을 그 권46의 오월과 유연제로 및 조선팔도에 각각 적용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없다.
필자는 삼국사기 권46과 남제서(南齊書)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신채호선생도 남제서를 읽었음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신채호선생이 삼국사 권46을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만약 읽었다면 고구리 백제 신라가 유연제로 오월 지역에 있었음을 알았을 터이니, 굳이 조선상고사나 조선사연구초 같은 저술을 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현실은 매우 엉뚱하였다. 삼국사 50권과 25사의 동이전이라는 방대한 사료가 존재함에도, 현대 한국 역사학은 이 모든 기록을 '조선팔도'라는 좁은 틀에 끼워 맞추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이다. 현재 한국이 차지한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겠다는 강고한 관점이다. 이 사관은 조선팔도에 맞지 않는 사서 기록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를 돌려보자.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정벌했다"는 기록을 이 땅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면 학자들은 어떻게 할까? 사료 자체를 의심하거나 부정하였고 지금도 부정한다.
하지만 나는 뒤집어 생각하였다. 사료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 대륙으로 눈을 돌려보면 모든 것이 명확
삼국사 50권과 25사 동이전의 공통부분을 추출하여, 이를 '조선팔도'가 아닌 동아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대입해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던 기록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서에 고구리에는 가한(간, 칸)이 있어, 고구리는 연방국이었음이 보인다. 아시아 전체가 삼국사의 무대다. 그렇다면 아시아인 모두 동족이라고 인식할 수 있고, 또 여러 사서의 난해하던 부분과 삼국사의 내용 모두 이해된다.
백제의 마한(馬韓) 정벌, 고구리와 수ㆍ당이 마주치는 관계, 신라의 고구리에 대한 갈등, 이 모든 것이 동아시아 대륙을 무대로 펼쳐진 거대한 드라마였다. 조선팔도라는 작은 무대에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는 역동적 흐름인 것이다.
대륙만이 아니었다. 삼국은 황해를 내해로 삼아, 이 땅은 물론 일본 열도까지 하나로 묶어 활동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야 고구리는 고구리대로, 백제는 백제대로, 신라는 신라대로, 나아가 가야까지 영향을 미쳐 일본 열도 곳곳에 그 네 나라의 지명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북에서부터 황해연안을 거쳐 월남의 북쪽지역까지 경제가 부흥된 영역의 풍요로운 경제권역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꽤 많은 동이전에서 백제 동남부에 존재한다고 기록된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비로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동쪽에서,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인, ‘중원’에 위치하는 당나라와 연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백제가 패망한 땅을 신라와 발해가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사실(史實)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반도사관이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여 절대로 언급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삼국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원인을 찾은 것이다. 고구리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륙 전체를 무대로 보면, 삼국사는 동족의 역사로서 완벽한 일관성을 가진다.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저절로 정리된다.
김부식이 사대주의 사관? 천만의 말씀

많은 이들이 삼국사를 '사대주의적'으로 쓰였다고 비판한다. 중국에 대한 사대 의식이 역사 서술 전반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삼국사 권46을 다시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강병 100만으로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정벌했다"는 이 표현이 사대주의자라면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오·월은 대륙 남방의 한계 유·연·제·로는 소위 중국역사의 북방 한계다. 삼국시대 선조들이 이 모든 지역을 정벌했다는 기록은 명백한 자주 사관으로 쓴, 대륙 경영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물론 삼국사 곳곳에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았다거나 조공을 바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 통치하지 못한 지역, 즉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원 왕조와의 외교 관계를 표현할 뿐이다.
삼국사는 사대주의로 쓰인 사서가 아니며, 그 무대가 동아시아 전역이었기에, 조선팔도에 갇힌 조선과 조선 후대 사람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또 하나의 함정: '조선팔도만 같은 민족'이라는 착각
또 다른 문제는 잘못된 민족사관이다.
삼국유사 이래, 우리 역사학은 이 땅(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역사만을 '우리 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주제는 뒤에 상세히 다룰 것이다.) 그 결과 조선팔도 사람들만 우리 민족이고, 그 밖은 타민족이라는 협소한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삼국사를 정독하면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서쪽 대륙에 있던 우리 선조들, 특히 만주를 포함한 북방과 함께 현재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에 있던 조선 사람들도 모두 동이족이다.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만약 삼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역사를 배웠다면 어땠을까? 고구려의 강력한 기마 문화, 광활한 영토, 당당한 외교 - 이 모든 것이 우리 역사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해상력, 문화적 세련됨, 일본에 대한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몽골은 어떨까? 돌궐은? 이들을 단순히 '다른 민족'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을 ‘구이(九夷)’로 표현하고 싶다. 지리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역사적 뿌리는 같은 - 고구리의 후예이자 (고)조선의 후예인, 같은 동이족이다.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삼국사와 그 역사적 무대를 하나로 연결하는 연구이다. 조선팔도에 가둔 역사를 동아시아 대륙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말 속에 숨은 역사의 비밀
역사 기록을 추적하던 중, 필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의 공통부분을 비교하다 보니, 많은 명칭들이 현재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우리말 어원 연구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문헌인 『훈몽자회』와 『팔도방언자회』를 기본 자료로 삼고, 입수할 수 있는 각종 자전의 부록으로 실린 자휘를 참고삼았다. 다행스럽게 이 책들에는 잃어버린 우리말의 원래 뜻들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결론만 언급하자면 우리는 우리말의 어원도, 글자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여기서 줄이고 다음 기회에 자초지종을 올리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