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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유순] 계룡산의 마지막 잎새

▲ 정유순/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계룡산(鷄龍山, 845m)은 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형제봉 등 20여 개의 연봉이 길게 이어지며 산세를 이룬다. 오래전부터 풍수지리상으로 이름난 명산으로 꼽혔고, 조선 초에는 새 도읍을 정하려는 계획까지 있었을 만큼 기운이 센 산으로 알려졌다.


정감록(鄭鑑錄)에는 계룡산을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하나로 기록하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 덕분에 조선 후기에는 여러 도참사상과 신흥종교의 본거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1980년대 종교정화운동 이후 이곳의 도교와 민속신앙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산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도를 품은 채, 묵묵히 사계절을 건너고 있다.


동학사탐방지원센터에서 천정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큰배재로 향해 걷는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활엽수들은 이미 잎을 다 떨구어버렸고, 참나무 가지에는 여전히 말라붙은 잎들이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자연은 늘 붙잡음놓음사이를 오간다. 떨어진 잎은 흙으로 돌아가고, 흙은 다시 나무의 뿌리를 살린다. 낙엽은 스스로 사라지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이 자란다. 그것이 우주의 대순환이며, 시작이자 귀결이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천정골 갈림길에 이르자 숨이 턱에 찬다. 그때마다 자연은 겸손을 가르친다. 산은 언제나 사람을 낮추어 세운다. 숨이 가빠오더라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산행의 묘미이다.


살아오며 나는 늘 정직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삶의 궤적은 강물처럼 구불거린다. 진리라 믿었던 것, 정의라 여겼던 것, 윤리라 배웠던 것들이 세상의 굽은 길을 따라 흐르다 보면 그 모양은 달라진다. 산길은 직선이 아니듯, 인간의 길도 직선일 수 없다. 굽이침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이해한다.


천정골 갈림길에서 다시 힘을 내어 오르니 큰배재에 닿는다. 이 고개는 대전 유성과 공주 사람들의 왕래 길이었고, 물산을 교환하고 삶을 나누던 생명의 통로였다. 한때는 짐을 지고 넘던 길이었고, 지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길이 되었다.


고개에서 길을 남쪽으로 돌리면 남매탑이 있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남매탑은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중턱에 자리한 두 개의 탑으로,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옛 절 청량사가 있었다고 하여 청량사지쌍탑(淸凉寺址雙塔)’이라 불린다. 청량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으나, 두 탑은 남아 백제계 석탑의 전통을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의 고승 상원은 수도 중 호랑이를 구해주었고, 그 은혜로 호랑이가 상주의 한 처녀를 스님에게 데려왔다고 한다. 스님은 여인을 정성껏 보살폈으나 여인은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상원은 고뇌 끝에 여인을 누이로 삼고 청량암을 짓고 수도를 계속했다.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두 탑을 세워 스승과 여인의 인연을 기렸다고 한다.


남매탑 앞에 서면 바람 속에 오래된 사연이 들려오는 듯하다. 인간의 사랑과 초월, 미련과 단념이 이 탑의 돌 층마다 새겨져 있다. 돌탑은 말이 없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무너진 신앙과 회한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랫동안 발길을 멈추었다.

다른 일행들이 삼불봉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상원암으로 향했다. 암자 마당에 서서 늦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흘러가도 산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세월만이 한 잔 막걸리처럼 빠르게 기울어간다. 그리운 이름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지나간 인연들도, 덧없는 세월도, 모두 낙엽처럼 땅에 내려앉아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동학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밑에서는 낙엽이 계속 미끄러진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 속에서도 가을빛은 찬란했다. 석양에 물든 단풍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동학사는 천삼백 년의 시간을 품은 고찰이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스님이 암자를 세우고, 제자 회의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가 지금의 위치로 중창하면서 왕실의 원당이 되었고, 조선 세조는 이곳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비롯한 원혼들의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세조의 찬탈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직접 동학사라는 이름을 내리고 사액(賜額)했다.


계룡산의 세 곳의 사찰인 갑사, 신원사, 동학사는 각각의 얼굴을 지닌다. 갑사는 불교 전통의 맥을 이어왔고, 신원사는 산신을 모신 중악단이 있어 우리 고유의 토착 신앙 향기가 짙다. 동학사는 유교의 제의(祭義) 정신이 배어 있는 불교사찰로, 한국 종교 문화의 다층적 면모를 보여준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 탐방객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동학사 일주문 안에는 미타암, 길상암, 관음암 등 여러 암자가 줄을 잇고, 불교문화원 앞 길옆으로는 석양에 붉게 물든 단풍이 불타오른다. 가을은 이미 끝자락으로 향했지만, 그 붉음은 오히려 더 깊다.

나는 문득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를 떠올렸다. 삶의 의욕을 잃은 화가 지망생이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 자신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 믿었을 때, 노화가 베어만은 마지막 잎을 벽에 그려 그녀에게 희망을 남겼다.


계룡산의 낙엽도 어쩌면 그런 잎새일 것이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도 끝까지 가지에 매달려 남은 한 장의 잎, 그것이 희망이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그 마지막 잎새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산을 오르며, 나는 깨닫는다. 인생은 결코 오르막만도, 내리막만도 아니다. 굽이진 길마다 스스로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버리고 또 얻는다. 낙엽이 흙이 되어 숲을 이루듯,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흙이 되리라. 계룡산의 바람은 그렇게 속삭였다. “끝은 다시 시작이고, 낙엽은 곧 봄의 약속이다.”


▲계룡산남매탑 (필자 정유순 제공) ⓒ한국공공정책신문



瓦也 정유순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저서 <정유순의 세상걷기>, 

    <강 따라 물 따라>(신간) 등







작성 2025.10.25 19:55 수정 2025.10.2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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