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슬람권의 한 도시에서, 일곱 살배기 아들의 '순나(Sunnah, 할례)' 잔치에 초대받았던 그날 오후를 잊지 못한다. 왕자처럼 하얗고 화려한 옷을 입은 아이는, 수십 명의 하객 앞에서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음악이 울렸고,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며 아이의 '진정한 무슬림'으로서의 새출발을 축하했다.
그것은 단순한 포경수술이나 의학적 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아이가 '움마(Ummah, 이슬람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가장 장엄하고 기쁨 넘치는 '사회적 탄생'의 의례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이 자신과 같이 아브라함(이브라힘)의 계보에 섰다는 자부심이, 어머니의 눈에는 고통을 이겨낸 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안도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뜨거운 공동체적 기쁨 속에서, 나는 이방인으로서 한 가지 깊은 묵상에 잠겼다. "저토록 강렬하게 '소속'과 '정결'을 갈망하는 영혼에게, 진정한 할례는 과연 무엇일까?"
'순나'라는 이름의 뿌리 깊은 갈망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할례'라는 주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이는 중동에서 태동한 세 유일신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공유하는 독특한 유산이지만, 이슬람 사회만큼 이 의식을 삶의 중심에 두고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삼는 곳은 드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는 남성 혹은 여성 할례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이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력한 실천의 근거는 어디인가? 이슬람의 형제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 그들은 언제나 '순나(Sunnah)'를 그 답으로 제시한다.
'순나'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행하거나 권장한 모든 행동과 삶의 방식을 의미하며, 꾸란 다음가는 권위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순나'를 기록한 것이 바로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디스 모음집으로 '사히하인(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책)'이라 불리는 '부카리'와 '무슬림'의 기록을 보면, 무함마드는 할례를 "알라가 정한 '순나'이며, 청결의 상징"이라고 분명히 언급한다. 그는 할례가 곧 신앙의 증표이며, 무슬림 남성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예언자들의 전통, 특히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계승임을 명시했다.
그들이 '꾸란에는 없지 않은가?'라는 신학적 질문에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꾸란이 '이브라힘(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르라'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하디스가 바로 그 '어떻게' 따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슬람의 할례는 그들에게 두 가지 심오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정결(Tahara)'의 상징이다. 이는 위생을 넘어선 '예배적 정결'이다. 알라 앞에 더 깨끗한 몸으로 나아가기 위한 헌신의 표시다.
둘째, '소속(Belonging)'의 증표이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움마'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아브라함의 신앙적 후손임을 육체에 새기는 것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무슬림 친구에게 할례는 그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그것은 영적 정결함과 신앙의 순결성을 향한 그들의 진지한 열망의 외적 표현이었다.
복음의 '파열': 육체의 흔적이 아닌 영의 변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이 뜨거운 신앙적 열망을 마주할 때, 우리의 태도는 결코 비판이나 무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정결'과 '소속'을 향한 그토록 깊은 갈망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도 바로 이 '할례'라는 주제가 거대한 분수령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서신서는 이 '할례' 문제에 대한 신학적 혁명을 선포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 문제로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이방인도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히 '파열'에 가까운 선언을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6, 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육체적 할례의 가치를 단호히 '무효(nothing)'라고 선언한다. 그는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건 육체에 새긴 흔적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못 박는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할례'가 무엇인지 그 개념 자체를 재정의한다.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로마서 2:29,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이슬람의 '순나'가 인간의 손으로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어 '밖에서 안으로' 정결함을 이루려 하는 의식이라면, 복음의 '할례'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안에서 밖으로' 거룩함을 이루시는 '사건'이다.
무슬림 형제들이 '정결'을 위해 '의식'을 행할 때, 기독교인들은 '정결'을 위해 '성령'을 의지한다. 무슬림들이 '소속'을 위해 '육체의 표'를 새길 때, 기독교인들은 '소속'을 위해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
교차점에서의 대화: 겉의 의식인가, 속의 생명인가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토론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 이슬람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영혼들의 가장 깊은 갈증과 직결된다.
이슬람의 할례 의식을 성실히 이행하고,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이것으로 충분한가?"라는 영적 공허함을 고백하는 수많은 무슬림 친구를 만났다. 그들은 '순나'를 따름으로써 얻는 공동체적 안정감에는 만족했지만, 알라 앞에서 자신의 죄와 내면의 더러움이 과연 해결되었는지에 대한 '개인적 확신'에는 목말라했다.
바로 이 지점이, 이슬람과 복음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이들에게 다가가 "당신들의 할례는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접근이다. 그것은 그들의 삶과 정체성,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전체를 부정하는 폭력일 뿐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부정'이 아니라 '완성'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이 할례를 통해 그토록 갈망하는 그 '정결함'과 '하나님께 속하려는 열망'은 참으로 거룩하고 귀한 것입니다. 저 역시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할례는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할례는 일시적이고 외면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라는 근본적인 뿌리를 잘라내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마음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베어내고 새 마음을 주시는 내적 '변화'이다. 이슬람의 할례가 '옛사람'인 채로 그저 깨끗하게 씻어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이라면, 기독교의 할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능력이다.
이 메시지를 전할 때, 형식적 신앙의 한계와 내적 공허함으로 고민하던 많은 무슬림 영혼이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 추구했던 '정결'과 '소속감'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만 온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음을 찢으라: 진리를 향한 마지막 초대
우리는 무슬림 친구들을 향해 그들이 가진 '순나'의 열정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열정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슬람의 할례가 추구하는 그 신앙의 순수성과 정결함의 완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혜롭게 증거해야 한다.
결국, 이슬람과 복음의 교차점에 서 있는 '할례'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희는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 돌아오라." (요엘 2:13)
옷을 찢는 것, 살을 베어내는 것은 외적 헌신의 표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겉모습 넘어, 우리의 중심,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무슬림 친구들에게 전할 나눔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신실한 후손으로서 육체에 새긴 그 표가,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초대이다. 그럴 때, 그들은 비로소 의무의 무게에서 벗어나 참된 영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