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의 두려움을 넘어 은혜의 축제로 나아가는 길
내 기억 속에는 잊히지 않는 한 노인이 있다. 이름은 '압둘라'. 그는 내가 살던 동네의 작은 모스크지기였다. 새벽 4시,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어김없이 일어나 모스크의 문을 열고 아잔(Adhan)을 울렸다. 그의 이마에는 오랜 기도 생활로 인해 생긴 거무스름한 굳은살, 이른바, '제비바(Zebiba)'가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율법에 철저했다. 라마단 기간에는 침조차 삼키지 않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빵을 떼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뜨거운 민트 차를 나누며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의 헌신적 삶을 칭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압둘라, 당신처럼 평생을 신실하게 살았으니, 훗날 낙원(Jannah)에 들어갈 확신이 있겠지요?"
그 순간, 찻잔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짙은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네. 심판의 날, 알라께서 내 행위의 무게를 저울(Mizan)에 달아보시기 전까지는... 나는 그저 두려움 속에 엎드릴 뿐이라네. 인샬라(신의 뜻이라면)."
그의 대답은 내 영혼을 강하게 때렸다. '인샬라'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구원의 불확실성이 주는 서늘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슬람의 세계관에서 구원은 철저한 '거래(Transaction)'다. 오른쪽 어깨의 천사가 기록한 선행(Hasanat)이 왼쪽 어깨의 천사가 기록한 악행(Sayyiat)보다 무거워야만 낙원의 문이 열린다. 그들에게 선행은 구원을 사기 위한 화폐이며,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한 마일리지 적립(점수 쌓기)이다. 그러니 그들의 선행은 늘 불안하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혹시 내 악행이 더 무겁지는 않을까?" 이 끊임없는 질문이 그들을 율법의 채찍 아래로 몰아넣는다. 그들의 선행은 아름답지만, 그 동기는 슬프게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그날 밤, 압둘라의 뒷모습을 보며 십자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우리는 과연 그들보다 더 뜨거운가? 우리는 그들보다 더 이웃을 사랑하고, 더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부끄럽게도 선교지에서 만난 무슬림들의 도덕적 치열함에 비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가볍고 안일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독교와 타 종교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수령은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행위의 동기'다. 무슬림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To earn)' 땀 흘려 선을 행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Because earned)' 감격하여 선을 행한다. 이 순서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혁명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 보자. 엄청난 빚을 지고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주인의 집에서 머슴처럼 일한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다. 주인이 언제 자신을 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아무리 일해도 빚이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뿐이다. 그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벌벌 떤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종'의 모습이다. 저울 앞에 선 무슬림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렀다. "네 모든 빚은 탕감되었다. 더 이상 너는 종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 그리고 족쇄를 풀어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자, 이제 이 사람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그가 다음 날부터 일을 멈추고 방탕하게 살까?
아니다. 만약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다음 날 더 일찍 일어나 주인의 밭으로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놀림은 전날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어제까지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오늘부터는 '감사'가 그를 움직이는 엔진이 된다. 그는 밭을 갈며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아들 삼아 주시다니!"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인이 좋아하는 꽃을 심고, 주인의 기쁨을 위해 땀을 흘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아래 있는 자녀'의 모습이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의 선행은 '조건'이 아니라 '반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Tetelestai)"라고 선포하셨을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율법적 거래는 종료되었다. 상업적 용어로 '테텔레스타이'는 "지불이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심판대의 저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로 인해 이미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고정되었다. 더 이상 흔들리는 저울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생명에서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다.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 끙끙거리며 사과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로 접붙임을 받았기에 계절이 되면 풍성한 사과를 맺는 것, 이것이 복음의 원리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곁을 떠난 지금,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나는 종종 가슴이 시리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너무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행위는 대충 해도 된다"는 식의 방종이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이것은 '구원파적 이단'의 논리이지, 성경적 복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라. 연인이 "나를 사랑하면 저 별을 따다 줘"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에 빠진 자는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며 밤을 지새운다. 십자가의 사랑을 진짜로 만난 사람은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 압도적인 은혜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억지로 짜내는 봉사가 아니라,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의 고백이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두려움에 떨며 바치는 뇌물이나 마일리지 적립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신 아버지께 드리는 향기로운 '연애 편지'이자, 구원받은 자들의 '축제'다. 무슬림들이 알라의 저울을 두려워하며 비장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 '공로의 탑'이라면,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의 춤'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혹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이유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은 아닌가? "이렇게라도 해야 복을 받지, 이렇게라도 해야 천국에 가지"라는 종교적 거래 심리가 당신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십자가의 자유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압둘라처럼 보이지 않는 저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라.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서 당신의 모든 죗값은 치러졌다. 당신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당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 뜨겁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눈치 보며 억지로 하는 100가지의 선행보다, 감격에 겨워 자발적으로 건네는 물 한 잔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다.
율법의 저울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영혼은 오늘도 두려움 속에 엎드린다. 그들을 향해, 그리고 율법주의에 갇힌 우리 자신을 향해 외치고 싶다.
"저울은 깨졌다! 이제 두려움의 노예가 아닌, 사랑의 아들이 되어 세상 한복판에서 감사의 춤을 추라!"
그 춤사위가 닿는 곳마다 진정한 선행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