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를 제대로 연구하면 조상나라의 영역이 보인다
삼국사는 삼국시대를 기록한 유일한 정사임에도 그 평가는 유별나게 박하다. 국권상실기 일본 史學者(사학자? 내 눈에는 詐謔者 또는 邪虐者일 뿐)들이 충실하게 군국주의의 앞잡이 노릇하며 書名(서명)까지 바꿔 평가절하하였음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에게 세뇌되어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 삼국사를 폄하하는 우리나라 사학계는 더욱 안타깝다. 어떨 때는 삼국사를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귀중한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어 놀랍다. 그러나 삼국유사가 남긴 단군 기록은 단편적이고, 실증적·지리학적 근거도 없이 미약하며, 오히려 우리 사학계 전체를 깊고도 허망하게 왜곡시킨 측면이 있다. 이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반도사관의 첫 단추라는 언급만 남긴다.
삼국사에 대한 냉대는 다양한 이유가 제기되어 왔다. 필자 또한 삼국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불만스러운 대목이 있다. 무엇보다 지나 사서에 등장하는 몇 년짜리 단명한 적국조차 예외 없이 ‘황제국’으로 칭하고, 그런 나라에 조공하였다는 기록은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편찬자 김부식이 당연히 알 수 있을 법한 삼국시대 중요한 지명을 포함하여 300곳이나 ‘모른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은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후손들이 삼국의 위치를 쉽게 파악하도록 기술하지 못하여 영역만이 아니라 문화조차 곡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나 25사 가운데 18사를 모두 합쳐도 삼국사를 능가하기 어렵다. 1980년대부터 삼국사를 연구하여 삼국시대 이후 처음으로 삼국의 주된 영역을 올바로 파악하여 발표한 오재성선생이 강하게 주장해 왔고 필자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규보의 ‘구삼국사’ 언급이 삼국사의 부족함을 증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前略)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中略)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 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 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後略)
(전략)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았다. (중략) 김부식 공이 국사를 중찬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후략)
이 기록은 오늘 우리가 읽는 삼국사가 다양한 요소를 생략한 ‘축소판’임을 보여준다. 또 동명왕편에 남은 구삼국사의 기록과 비교하면, 현재의 삼국사는 지나치게 자기비하적 서술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첨단과학의 발전은 삼국사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오히려 더 탄탄하게 입증하고 있다. 예컨대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천문이나 기상에 대한 기록을 지나 사서와 비교하고, 과학적 증명보다 평가절하의 항목으로 치부되었으나, 첨단과학으로 증명되며 오히려 삼국사의 신뢰성을 점점 더 높여준다.
첨단과학이 입증한 삼국사의 신뢰성
역사학 연구에서 사서의 기록이 최우선이라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첨단과학의 융합이 필수적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직결되며, 모든 학문 자료가 정합될 때 과거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천문 기록은 세차운동까지 감안하면 몇천 몇만 년이 지나도 역산이 가능하므로 기록의 신뢰성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우리 종족은 단순한 태양 숭배를 넘어 별과 해의 움직임을 포함한 모든 천체운행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의 대표적 국가가 한국이었고, 이 사실이 뒤늦게나마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삼국사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느 나라 사서보다 독특하고 많은 천문기록이 담겨있어,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세계적 기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권상실기에 우리나라를 시기하고 무시하던 일본사학자들은 삼국사가 지나 사서를 베꼈다고 엄청 깎아내렸다. 심지어 그들에게 세뇌된 우리나라 일부 사학자들은 첨단과학이 밝히는 기록조차 외면하고 있다.
연구발표 당시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였던 박창범의 일식 연구는 결정적이었다.
삼국사에 기록된 일식 66건 가운데 53건이 실현되었던 일식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실현률은 80%인 것이다. 비교하자면,
삼국: 80%
한나라: 약 78%
당나라: 약 70%
일본(628~950년): 35%
즉, “중국 사서를 베낀 기록”이라는 기존의 비난과 정반대의 결과다. 삼국사가 오히려 더 정확한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창범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식이 실제로 관찰 가능한 지역의 지리적 분포를 역추적했다. 일식은 둥근 지구 위에서 특정한 띠를 따라 지나므로, 여러 기록의 겹침이 반복되는 장소는 곧 ‘관측자 집단의 중심지’, 즉 수도일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는 통설과 크게 충돌한다.
신라: 양자강 유역
백제: 하북성 일대
고구리: 외몽골–내몽골 경계 일대
즉, 삼국사에 등장하는 중심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역사적 파장은 매우 크며, 추후 별도 글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삼국사는 통사가 아니라, 단군 기록 부재를 비난할 수 없다
삼국사를 비판하는 대표적 주장 가운데 하나는 “단군 기록 없음”이다. 그러나 삼국사는 애초에 환국·조선·부여·삼한을 포함하는 통사가 아니라, 삼국 자체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단군 기록이 없음을 문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단군 기록이 일부 존재하지만 높이 평가할 수 없다.
내용도 매우 적고,
신화성에 치우쳤으며
명확한 연대, 지리, 제도에 대한 기술도 부족
이러한 기록이 2천 년 넘는 조선에 대한 사료가 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안다. 이렇게 빈약한 삼국유사의 단군의 기록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단군 47세의 재위, 업적, 문화, 제도 등을 상세히 기록한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은 외면받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사관의 잔재가 너무도 깊이 남아 있어 이들 문헌은 ‘위서’로 단정되고 연구조차 금기시될 뿐이다.
삼국사에 단군과 조선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도 아니다. 예컨대 소호금천씨를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조상으로 언급하고, 신라인을 ‘조선 유민’이라 하는 등으로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옛 조선 이전·이후의 인물이 가리지 않고 기술되었다.

상대사시중장은 동아시아 역사를 밝히는 황금 열쇠
삼국사를 읽으며 가장 답답한 점은 방위·지리 기술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서도 대동소이하여, 상세한 국경의 위치를 추정하기 쉽지 않음은 여전하다.
그런 어려움을 한번에 열어주는 황금 열쇠가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에 비장되어 있다. ‘상대사시중장’이란 ‘대사시중에게 올리는 편지’라는 말인데, 이 편지에 담긴 22자,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는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뒤흔들 만큼 충격적이다. 고리(고구리)와 백제가 오월과 유연제로 영역을 차지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보자.
삼국사 권46 최치원전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다. 마한은 곧 고〔구〕리,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다. 고리(고구리)·백제는 전성 시기에 강병 100만으로 남쪽으로는 오·월을 침략(차지)하였고, 북쪽으로는 유·연·제·로를 휩쓸어 중국의 큰 해충이 되었다. 수나라 황제가 권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이 원인이었다. ~
삼한, 즉 마한, 변한, 진한의 영역이 고리, 백제, 신라가 되었고,
그 삼국이 남쪽과 북쪽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오와 월, 유연제로를 모두 차지하였다.
대륙 전체에 한족의 국가가, 만주와 현재 남북한에는 삼국이 존재했다는 통설을 한번에 뒤집는 내용인 것이다.
동양 사학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연구하였다는 말인가? 심지어 이병도의 삼국사기 번역본(을유문화사 1996년 초판)에는 “이상은 誇張(과장)”이라는 원문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私見(사견)을 삽입하였다. 번역문에 원문을 비판하는 사견을 추가하는 행위는 학문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이 언급이 조금도 거짓일 수 없다는 증거는 이 편지 끝에 밝혀져 있다.
伏乞 大師侍中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엎드려 바라는바, 대사시중께서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증[劵牒]을 내려, 소재지 관청이 배편을 제공하고 식사와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나귀와 말과 사료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군장을 보내 황제 어가 앞까지 호송을 감독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여기에서 언급한 태사 시중은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최치원이 당에 가는 사절로 지명되었으나 당나라나 신라 모두 말세에 흉년이 들고 도둑이 횡행하며, 전례도 있는 만큼 사절로 가는 나 최치원을 경호해 달라는 요구이다. 즉 왕이 쓴 국서는 아니지만 거의 외교문서에 상당하는 문서인지라 거짓을 나열할 수는 없다.
사족을 붙이자면, 앞의 두 예문 사이에 피력한 내용을 보태어 이해하면 더 놀랍다. 신라가 당나라보다 역사적 전통이 있을뿐더러, 당나라는 신라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라임을 돌려서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를 뒷받침하는 지나 사서의 동이전
―찢겨 사라진 남제서 324자가 시사하는 백제의 실체 ―
지나의 사서는 분량은 방대함에도 과장과 함께 상호 모순이 공존하지만,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그 가운데 동이전은 삼국사만으로 알 수 없는 내용을 풍부하게 보완한다. 대표적 사례가 후한서, 삼국지 등인데, 南齊書(남제서)도 빼놓을 수 없다.
남제서는 남제의 존속 년수(479~502, 24년)와 백제 동성왕(479~501 재위) 재위 기간이 거의 일치하여 흥미롭기도 하며, 그 존속기간의 사건을 꽤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고리와 백제 관련 중요한 부분 약 324자가 통째로 찢겨 없어졌다.
앞쪽은 고리(고구리) 기사, 뒤쪽은 백제 기사로 연결되는 부분이므로, 결락된 부분에 고구리와 백제의 전투·영역·외교 활동과 직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아 있는 기사만으로도 동성왕의 눈부신 연전연승이 확인되며, 당시 백제의 주 활동 무대가 이 땅의 충청도와 전라도일 것이라는 통설을 뒤집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히 포상 장군 명단에 등장하는 ‘낙랑태수·조선태수·성양태수·청하태수·대방태수’ 등의 지명은 오늘날 지도와 대조할 때 대륙 전역과 연결된다.
남제는 24년 동안 7명의 왕이 교체되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쟁탈의 연속이었고, 도읍은 형주·무창 일대였다. 호북성 무창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이곳을 “육조무창성”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이 결코 과장일 수 없고, 동아시아 역사의 진면목을 열어젖히는 황금열쇠라는 사실에 대못을 박고 있다.
이 남제서 내용은 여기에서 끊고 다음 기사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