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는 때로 운명이 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900km에 달하는 국경선은 단순한 지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와 피, 종교와 문화가 얽혀 있는 거대한 핏줄과도 같다. 시리아가 아프면 튀르키예가 열병을 앓는다.
2025년, 아사드 이후의 혼란 속에서 튀르키예가 보여주는 외교적 행보는 단순한 국익 추구를 넘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이웃을 살려내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그동안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이 갈리는 수많은 영혼이 있었다. 지금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향해 내미는 손길에는 3가지의 뚜렷한 지문이 찍혀 있다. 안보를 위한 '단호함', 난민을 위한 '책임감', 그리고 정치적 해결을 위한 '인내심'이다.
1. 안보 외교: "테러의 회랑을 끊고 평화의 띠를 두르다"
튀르키예 외교의 제1원칙은 명확하다. 바로 국경 남쪽에 적대적인 '테러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스라엘과 미국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SDG/YPG 주도의 분권형 연방제는 튀르키예에 있어 악몽과도 같다. 이는 튀르키예 남부의 안보를 영구적으로 위협하는 '테러 회랑(Terror Corridor)'이 완성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튀르키예는 군사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아다나 협정(Adana Agreement)'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려 노력한다. 이는 시리아 정부가 자국 영토 내에서 튀르키예를 위협하는 테러 집단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튀르키예 외교관들은 다마스쿠스의 새 정부를 향해 끊임없이 설득한다. "당신들의 주권을 갉아먹는 분리주의 세력을 방치하지 말라. 우리가 당신들의 통합을 돕겠다." 이는 겉보기엔 내정 간섭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시리아의 영토 보전이 곧 튀르키예의 안보와 직결된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다. 튀르키예는 시리아가 쪼개지는 것을 막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2. 인도적 외교: "손님을 다시 주인으로, 귀향을 위한 집짓기"
튀르키예에는 3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이 튀르키예의 뒷골목에서, 텐트촌에서 겪는 설움을 보았다. 튀르키예에 시리아 안정화는 곧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튀르키예 내부의 사회적 압력을 줄이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떠돌이 신세가 된 형제들이 다시 제 땅에 뿌리 내리게 하려는 인도적 사명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튀르키예는 단순히 "돌아가라"라고 등 떠밀지 않는다. 그들이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시리아 북부에 건설하는 외교적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주택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운영하며, 국제 사회의 투자를 유치하려 동분서주한다. 카타르나 쿠웨이트 같은 걸프국가들의 자본을 끌어들여 시리아 재건 펀드를 조성하려는 노력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구체적인 땀방울이다. 이는 총칼보다 더 강력한 외교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는 평화도 깃들지 않음을 알기에, 튀르키예는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에서 평화의 기초를 놓고 있다.
3. 중재 외교: "총성을 멈추고 대화의 테이블로"
마지막으로, 튀르키예는 가장 어려운 길, 즉 '정치적 중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시리아 내전의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러시아, 이란, 미국, 그리고 시리아 내의 수많은 파벌—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대화의 불씨를 살려내려 애쓴다. 헌법위원회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과도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것은 튀르키예 외교관들의 피 말리는 일상이다.
특히 아사드 이후 권력 공백기 동안, 튀르키예는 시리아의 반군 출신 인사들이 제도권 정치로 연착륙할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펜을 들게 하는 것, 폭력이 아닌 투표로 미래를 결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튀르키예가 꿈꾸는 시리아의 안정화 로드맵이다. 비록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치여 때로는 무시당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튀르키예는 '이웃'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협상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진정한 이웃이 된다는 것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묵상해 본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으나,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려갔다. 지금 국제 사회라는 거대한 길 위에서 시리아는 강도 만난 자와 같다. 멀리 있는 강대국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지나가거나,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려 한다.
하지만 바로 옆에 사는 튀르키예는 그럴 수 없다. 그 피가 내 옷에 튀고, 그 신음이 내 창문을 넘어오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외교적 노력이 모두 순수한 이타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국익이라는 냉정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 계산 속에서도 우리는 불타는 이웃집을 향해 물동이를 들고 뛰어가는 한 국가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야 한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흉터를 꿰맬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