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한)나라에서 唐(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장안 중심의 천하관은 그들의 동서남북 사방에 四夷(사이)가 존재한다는 四夷論(사이론)에 근거하여 있었다. 즉 "중앙은 장안에 도읍한 국가, 한과 당이고, 그 주변은 사이가 에워싼다”는 중화 중심적 세계관이지만, 역으로 보면 그들의 활동 영역인 지나대륙에 이미 사방의 이민족들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宋(송)나라에 이르러 이 전통적 관점은 크게 변질된다. 송은 중화사상을 과장하고, 마치 한·당이 지나대륙 전체를 하나로 통치했던 것처럼 통일적 천하관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이·동이를 발해만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서기 900년 이전의 역사관이 뒤집혀 버렸다.
高麗고리를 증오한 소동파
소동파는 사천성 출신으로 본명은 소식이고 동파는 字자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유학자들이 그를 극찬했지만, 정작 그는 고구리(고리)와 고리를 노골적으로 혐오했던 인물이다. 이를 모르고 추앙했다면 무지이고, 알면서도 칭송했다면 학자적 자질의 결여라고 해야 한다.
조선 말 김윤식은 “운양집”에서 소동파를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덕으로 말하면 불인하고, 위엄으로 말하면 용맹스럽지 못하며, 지혜로 말하면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실로 가소롭다.”
그나마 동정적으로 보자면, 소동파는 고리가 송의 내부 정보를 遼요나라 등 적국에 흘릴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송의 실질적 피해는 요나라가 훨씬 직접적으로 가한 것임을 고려하면, 고리에 대한 그의 감정 표현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참고로 소동파의 이른바 ‘오해론(五害論)’을 소개하여 놓는다.
첫째 고려가 바치는 공물은 허접한 물건인데 반해 송나라가 지출하는 경비는 백성들의 고혈이다.
둘째 고려 사신들이 닿은 곳마다 백성들과 말, 기물 등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해야 한다.
셋째 고려가 송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분명 거란에 넘겨줄 것이다. 이것은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식량을 대주는 것이다.”(1093년의 ‘고려의 서적수매에 따른 이익과 손해에 대한 상소문’)
넷째 고려사신이 수집한 송나라의 모든 정보가 거란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 뻔하다.
다섯째 훗날 거란이 송나라와 고려의 교섭을 트집 잡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물을 가져온 고려 사신들을 빨리 추방시키라.
소동파가 만들어낸 지도 체계와 그 영향
소식(소동파)은 “歷代地理指掌圖역대지리지장도”라는 지도집을 편찬하면서 각 왕조가 차지한 강역을 44편의 지도로 정리하였다.
그 첫 번째 지도가 바로 古今華夷區域總要圖고금화이구역총요도이다.
이 한 장의 지도에서 北狄북적과 東夷동이를 발해만 동쪽으로 밀어낸 배열이 이루어졌고, 이 오류가 그대로 1100년 이후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 인식의 기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조선시대 학자들 중 누구도 이러한 왜곡을 비판하지 못하고, 그 지도를 맹신하여 오히려 역사연구의 기본인 사서를 불신하였다.
동이 삼국의 실제 영역; 유연제로, 오월 지역
소식은 사서, 그 중에서도 동이전을 제대로 읽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만약 읽었다면 아래 필자가 지적하는 기록을 모를 수 없다. 그러니 더욱 그를 존숭했던 고리 말부터의 조선 유학자들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
더욱이 삼국사는 조선시대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삼국사를 읽고 역사를 연구한 학자가 적지 않았음에도 상대사시중장을 평가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조차 악평이었다. 성호 이익은 “상대사시중장의 ‘고리백제 강성지시 강병백만 남침오월 북요유연제로’를 可笑(가소롭다)”고까지 하였다.
이 ‘상대사시중장’의 이 구절이야말로 고구리·백제·신라 삼국과 이를 계승한 초기 고리가 대륙 동쪽에서 활동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필자가 동양역사의 영역을 밝히는 황금열쇠라고 부르는 이유다.
삼국지와 후한서가 증명하는 동이의 대륙 위치
삼국의 수도권은 이미 삼국사에 기록된 일식(日蝕) 재현을 통해 과학적으로 복원되는 바 있다. 이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강력한 물적 증거다.
또한 중국의 이른바 25사 가운데 18사에 편성된 동이전(東夷傳)은 그 분량이 적더라도, 삼국이 대륙 동쪽에 실재했음을 모두 인정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종합적이고 명료한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이다.
두 사서는 시대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거의 복사본처럼 일치한다.
특히 각 민족의 위치·방위와 상대국과의 접경 관계는 다음과 같이 동일 구조로 나타난다.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제 30, “동이 부여 고구리 동옥저 읍루 예 한 마한 진한 변진 왜”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제 75, “이 부여 읍루 고구리 구리 동옥저 예 한 마한 진한 변진 왜”
먼저 이 두 사서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영역의 위치, 특히 방위를 알 수 있는 기사를 인용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천리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리와,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 夫餘國, (在長城之北), 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 |
| 읍루는 옛 숙신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 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
|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 |
| 동옥저는 고구리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其地東西夾,南北長 |
|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리·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 |
| 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
|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其南界近倭 (韓在帶方之南) |
|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 辰韓在馬韓之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
|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
| 왜는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이다. (왜인은 대방 동남 대해 가운데에 있다) |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㠀爲居,凡百餘國.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
이 기사들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배치하면 아래와 같이 동이 삼국은 발해만 동쪽 바깥이 아니라 요동의 동쪽(요서부터), 하북성 북부에서 해안 전체에 걸친 대륙 동부 권역에 자리잡았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 邑婁읍루 古肅愼옛 숙신 부여 동북 천리 동쪽 끝은 대해 쪽은 북옥저 | |||||
鮮卑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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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餘부여 현토에서 북으로 천리, 남쪽은 고구리 동쪽 읍루와 서쪽 선비와 닿았음 북쪽에 약수가 있음 | ||||||
北沃沮 (?) |
東沃沮동옥저 고구리 개마대산 동쪽 | |||||
遼東 (훗날 唐 이세민이 遼州로 개명) | 高句麗고구리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음 남쪽은 예맥, 조선, 동쪽은 옥저에 닿음 북쪽은 부여와 닿음, 구리는 맥이라고도 부름 | 동쪽끝 대해 북에 읍루와 부여 남쪽에 예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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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郡) 아래 ‘참고’를 보시라. | 濊예 북에는 고구리와 옥저 남은 진한, 동은 대해 서는 낙랑(군)에 이름 | |||||
韓한 | ||||||
馬韓마한 북은 낙랑 남은 왜 | 辰韓진한 북은 예맥 | 弁辰변진 진한의 북 남은 왜 | ||||
倭왜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 | ||||||
※ 참고: 낙랑군은 낙랑국과 다르다.
낙랑국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전하여지는 왕국이다. 낙랑군은 임명된 태수가 다스리고, 그 기록의 일례는
후한서 권76 循吏列傳 王景傳에는 태수의 교체를 기록하고 있다.
更始敗,土人王調殺郡守劉憲,自稱大將軍、樂浪太守。建武六年,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至遼東,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皆封爲列侯,閎獨讓爵.
경시제(이름은 劉賢.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 이후, 후한 광무제에 밀려 나라이름도 없는 황제)가 패하자, 낙랑 토박이 왕조(王調)가 군수(郡守)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낙랑태수이 되었다. 건무 6년, 광무제가 태수 왕준(王遵)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그를 쳤다. 요동에 이르자, 閎이 군의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굉만이 작위를 사양하였다.
위 표에 삼국지와 후한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지명을 넣으면 다음과 같다.
| 邑婁읍루 | |||||
鮮卑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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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餘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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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沃沮동옥저 海州(해주) | ||||||
遼 | 高句麗고구리 北平(북평) 太原(태원) 上谷(상곡) 漁陽(어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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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 | 濊예 滄海(창해) | |||||
韓한 | ||||||
加羅 斯盧 海(해) | ||||||
倭왜 儋耳(담이, 南越<남월>) 會稽(회계) 澶州(단주) 朱崖(주애) 台(이?) 夷州(이주) | ||||||
이 지명을 송 때부터 전해진다는 우적도(中國歷史圖說중국역사도설 권1에서 인용)와 이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결론: 사료는 원래 한 방향을 가리킨다
결국 소동파의 지도 왜곡 이후 “동이는 요동 밖의 오랑캐”라는 관념이 지나 사서 기록 전체에 고착되었다.
그러나 삼국지·후한서·삼국사·상대사시중장에 이르는 일관된 사료의 흐름은,
동이 삼국이 대륙 동부에서 중국 내부의 여러 민족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기록들을 종합적·과학적으로 재검증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 재해석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 역사 구조를 바로 세우는 핵심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