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舜순·箕子기자·孔子공자, 누구의 역사인가
— 동이(東夷) 문명권에서 다시 읽는 고대 인물들 —
중국 중심의 천하관 속에서 기록된 고대 사서는, 오늘날 우리가 인물의 정체와 활동 공간을 해석하는 데 많은 혼동을 남겼다.
특히 순(舜), 기자(箕子), 공자(孔子)와 같이 동아시아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친 세 인물은,
대개 ‘중국의 성인’이자 ‘중국 문명의 상징’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사서의 원문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그에 연결된 지명과 지형, 동이(東夷) 문명권의 공간 구조를 함께 살펴보면,
이들이 활동한 지역과 사회적 배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본 글은 순·기자·공자를 둘러싼 전통 인식을, 동이 문명권이라는 시야에서 다시 검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1. 舜순임금은 중국대륙의 帝제가 아니라 ‘東夷의 都君’이었다
우리는 흔히 순을 중국대륙 전체를 통치한 제왕, 곧 “성군 帝舜”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기』와 『서경』의 원문을 함께 보면, 순의 실제 위상은 이와 다르게 드러난다.
1) 『사기』가 보여주는 舜순의 출생과 신분
『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전한다.
“舜上虞人 去虞三十里 有姚丘 卽舜所生”
→ 순은 虞에서 30리를 가면 나오는 姚丘 출신, 즉 虞 일대 동이계 구릉 지역 출생이다.
또 “舜東夷之生姚丘”라고 하여, 순을 “동이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이미 동이에는 단군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또 단군 이전 시대에는 환웅인 ‘치우’라는 분이 있었고,
史記사기 黃帝황제 편(皇帝가 아니다)에서 ‘치우는 옛날 천자’라는 주석을 보더라도, 단군이 환웅의 천자 지위를 승계했다고 능히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순의 생존 시에는 동이에 단군보다 높은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대목이 사기의 주에 있다. 즉 舜을 기록한 史記의 첫 문장은
“虞舜者 名曰重華(우순은 이름이 중화이다)”
이 사기 기록에 대하여 남북조 시대 송나라 배인은 ‘집해’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皇甫謚云 舜字都君也”
→ 황보밀(皇甫謐)는 “순의 자는 都君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본문과 주석은, “중화는 ‘별명’이 도군이고, 시호는 순이다”라며 字자가 ‘도군’임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어떤 문서를 읽으며 독자는 행간을 읽는 통찰력을 발휘해야 한다. 왜 하필이면 별명이 “都君”일까?
“都君”이라면 동이 전체의 천자나 제왕이 아니라, 일정 지역 단위(都)를 다스리는 지방 군장·지방 통치자를 가리킨다.
즉, 순은 동이 문명권 내부에서 하나의 ‘도’를 맡은 지도자였지,
오늘날 중국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하를 대표하는 유일한 帝”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동이의 최고 지배자는 천자(天子), 즉 치우와 같은 환웅, 그리고 조선의 단군이었다.
그렇다면 순은 동이 문명권 내부의 한 지방을 맡은 지도자(都君)일 뿐, 천자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虞가 위치한 오늘날 강소성 일대는, 그 이전 九黎 시대부터 조선, 백제, 사로·신라에 이르기까지 사서에서 일관되게 동이의 땅으로 나타난다.
虞를 중심으로 보면,
북쪽에는 白馬河, 黃山, 東明, 동평(東平)의 蚩尤塚, 거야(鉅野)의 蚩尤肩臂塚,
서쪽으로 項城, 西華, 崇山,
남쪽으로 蒙城, 獨山, 桐城, 岑山, 德安,
동쪽으로 徐州, 臨城, 海, 大旺山, 泗之漣水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 지명들 상당수는 후대로 가면 고리(句麗), 백제, 사로·신라 등의 활동 무대와 겹치며, 동이 지명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2) 『서경(書經)』의 肆覲東后사근동후가 드러내는 舜의 위상
여기에 더해, 『書經서경의 「虞書우서·舜典순전」은 순의 위상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肆覲東后(사근동후)”
이 구절은, 순이 동쪽의 임금(東后)을 찾아가 뵙는 의례(覲禮근례, 賓禮빈례)를 행한 것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예제(禮制)에서 근례(覲禮)는 “제후가 임금을 뵙는 의례”로 이해된다.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가 예를 올리는 형식이다.
『서경』은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오례(五禮)와 함께 제후가 갖추는 공물·예물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五禮: 吉·凶·軍·賓·嘉
공물: 五玉·三帛·二生·一死贄 등 이른바 “五玉三帛二生一死贄”
이 구조 속에서 “肆覲東后”는,
순이 동쪽의 임금에게 정식 예물을 갖추고 나아가 뵈는 장면으로 읽힌다.
만약 순이 지나(支那)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천하의 유일한 帝”라면,
동쪽의 임금이 그에게 조현(朝見)해야 예제 논리가 맞고,
帝가 오히려 동쪽 임금에게 찾아가서 빈례(賓禮)를 행하는 구조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서경』의 구절을 오히려 반대로,
순이 동후(東后) 앞에 나아가 예를 받는 모습으로 해설하여 왔다.
그러나 이는 순의 위상이 “천하를 상징하는 유일한 帝”가 아니라,
동이 문명권 내부에서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맡은 都君, 즉 지역적 성격이 강한 군장이었음을 명쾌하게 시사한다.
정리하면,
『사기』는 순을 “東夷之生 姚丘”라 하여 동이 출신으로 기록하고,
황보밀은 “舜字都君也”라 하여 지방 군장(곧 都君)임을 암시했으며,
『서경』 「虞書·舜典」의 “肆覲東后”는, 순이 오히려 동쪽 임금에게 나아가 예를 올리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사료를 함께 읽으면, 순을 중국 대륙 전체를 통치한 제왕으로 보는 전통적 인식은, 지리·예제·문헌상 근거가 매우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순은 어디까지나 동이 문명권의 한 지방을 맡은 都君, 조선계 동이인의 정치 지도자로 보는 편이 사료에 더 가깝다.
2. 箕子는 한족이 아니라 명백한 東夷, 곧 朝鮮인이었다
기자는 오랫동안 ‘주 무왕이 조선에 봉한 제후’의 신분인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 결과, 기자를 한족 귀족이 조선으로 “파견된 존재”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사료를 하나씩 대조해 보면, 기자는 본래부터 동이, 즉 조선인이었으며,
周주가 기자를 이용해 동이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흔적이 더 뚜렷이 보인다.
『사기』 권 38은 기자를 “箕子者 紂親戚也”라고 하여, 은(殷) 마지막 왕 紂의 친족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殷墟는 하남성 안양현 소둔(小屯) 일대로, 태행산맥 동쪽, 곧 요동(遼東)에 연속되는 동이 문화권에 속한다.
『대청일통지』는 “西華故箕地 在開封府西九十里 初聖師食宋箕 故稱箕子 今邑中有箕子台”라 적고 있고,
기자대는 현존한다. 이는 곧,
서화(西華)가 본래 기자가 살던 땅이며,
기자라는 명칭이 “宋나라의 箕 땅에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서화 일대는 이후 신라–당의 경계 지역, 곧 신라의 項城과 맞닿는 동이의 땅으로 등장한다. 이 지리 구조를 고려하면, 서화는 조선 땅, 기자는 조선인이요 동이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기자와 조선의 관계를 다룬 사료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사기』: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주 무왕이 마침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한서』 권 28: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은나라가 도가 쇠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후한서』 권 85: “武王封箕子於朝鮮”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삼국지』 권 30: “箕子旣適朝鮮” (기자는 이미 조선으로 갔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서술의 일관성 부족이다.
두 곳에서는 “封(봉했다)”고 하고,
한 곳에서는 “去(떠나 조선으로 갔다)”고 하며,
다른 한 곳에서는 “旣適(이미 조선에 갔다. 곧 가서 살았다)”라고 한다.
만약 주 무왕이 실제로 기자를 “봉해서” 조선으로 보냈다면,
“이미 가 있었다(旣適)”거나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去之朝鮮)”는 서술은 성립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서술이 병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봉했다”는 부분이 후대 정치적 편집의 산물임을 암시한다.
또한, 『한서』의 “殷道衰 箕子去之朝鮮”은,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 살았다는 의미일 뿐,
그를 처벌하거나 다시 불러들이거나, 제도적으로 재편입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한 나라의 왕족·태자가 움직였다면, 정상적인 봉건 체제에서는 반드시 정치적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한 흔적이 없다는 것은, 기자가 애초에 동이 문화권 내부, 곧 조선 땅에서 살던 인물이었음을 뒷받침한다.
더구나 서화 일대는 기자 이후 2천 년이 지나 신라와 당의 경계로 등장하며,
그 남쪽에 光州, 獨山, 桐城, 岑山, 德安 등이 자리한다. 백제·신라 또한 25사의 공통된 인식에서 동이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조선–백제–신라에 이르기까지 동일 지역이 동이·조선 문화권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기자를 조선인으로 보지 않을 이유는 오히려 찾기 어렵다.
3. 孔子공자는 貊夷맥이 곧 동이·조선계 인물이었다
공자의 출생지인 산동성 곡부(曲阜)는 고대부터 구리–백제–신라에 이르는
동이 지명대(地名帶)의 중심에 해당한다. 곡부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지명들이 둘러싸고 있다.
북쪽: 大山, 黃山, 力城, 平原, 淸河, 滄海, 天眞, 安平(대산, 황산, 력성, 평원, 청하, 창해, 천진, 안평)
서쪽: 東平, 鉅野, 兗州, 鄆州, 東明, 遼, 鹵城, 高平, 晉城, 西華, 項城(동평, 거야, 연주, 운주, 동명, 료/요, 로성, 고평, 진성, 서화, 항성)
남쪽: 白馬河, 豊, 臨城, 歸德, 虞, 蒙城(백마하, 풍, 림성, 귀덕, 우, 몽성)
동쪽: 泗水, 白馬, 諸城, 靑島(사수, 백마, 제성, 청도)
이 지명들 상당수는 후대에 고리(句麗), 백제, 신라의 활동 무대로 다시 등장하며, 동이 문화권의 공간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후한서』 권 85: “故孔子欲居九夷”
『한서』 권 28: “故孔子悼道不行 設浮於海 欲居九夷 有以也”
대개 이 구절을 근거로, 공자가 “멀리 동쪽, 곧 오늘날 한반도에 와서 살기를 원했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료의 지리적 맥락은 다소 다르다.
九夷는 犬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 등을 가리키며,
이들의 거주지는 산동–강소–하북 동부 일대, 곧 요동을 기준으로 한 동쪽 동이 지역으로 이해된다.
동평·거야 일대에는 九黎의 14대 천자라는 蚩尤 천자 묘와 肩臂 묘가 남아 있어,
이 지역이 오랜 동이 왕권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강소성의 虞는 앞서 본 대로 舜의 출생지이자 東夷 都君의 활동 무대이고, 하남성의 서화는 기자가 살던 조선 땅이다.
서화에서 동쪽으로 곡부가 위치하니, 공자가 태어난 魯 역시 이 큰 동이 문화권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진(秦)·한(漢) 시대 기록에 따르면,
연(燕) 시대에는 태행산맥(요동)의 동쪽이 조선,
진나라 때에도 요(遼)의 동쪽은 “朝鮮·韓의 땅”,
한나라 때에도 요 동쪽과 강회 지역은 조선·한의 영역이었다.
고구리 모본왕은 기원후 49년 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진출했고, 146년에는 서안평(西安平)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214년 백제는 안평 서쪽의 石門을 점령했는데, 그 동남쪽에 곡부가 자리한다.
5세기 백제는 요동에 淸河, 城陽, 帶方, 廣陽을, 요서에는 晉城, 高平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 곡부가 있었다.
6세기 백제 지명을 곡부를 중심으로 보면,
서쪽에 東明, 晉城, 高平(동명, 진성, 고평)
북쪽에 黃山, 平原(황산, 평원)
남쪽에 泗滋河, 項城(사자하, 항성)
동쪽에 白馬, 諸城, 兩城(백마, 제성, 량성)이 있다.
결국 곡부는 구리에서 백제에 이르는 동안 항상 동이의 내부 공간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예맥조선이라 부르기도 하고, 濊·貊(예·맥)으로도 기록된다.
『고구리 관련 기록』에는 “句麗一名貊耳”라 하여, 貊耳가 조선의 별칭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따라서, 곡부 출신의 공자는
지리적으로 동이 문화권 안에 있었고,
민족·문화적으로 貊夷, 곧 조선계 동이인으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맺음말 — 동이 문명권의 회복은 역사의 균형을 되찾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舜은 동이 출신으로, 『사기』와 『서경』이 함께 증언하는 **“東夷의 都君”**이었다.
箕子는 은 왕족으로서 조선 땅 서화에 살았던 동이인, 곧 조선인이었고,
孔子 역시 곡부를 중심으로 한 동이 지명대 속, 貊夷·조선계 문화권의 인물이었다.
이들 세 인물을 모두 “중화 제국의 성인”으로만 묶어 해석하는 것은,
문헌상의 직접 증언과 지리·지명·예제(禮制)의 정합성을 무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동이 문명권, 곧 옛 조선의 관점에서 사서를 다시 읽으면,
동아시아 고대사의 주체가 훨씬 넓고 다원적인 구조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동이를 변방으로 밀어낸 후대의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 역사와 땅의 진정한 위치는 언제나 축소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순·기자·공자를 동이 문명권의 맥락에서 다시 세우는 작업은,
잊힌 역사 공간을 복원하는 첫걸음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균형을 되찾는 일이다.
‘우리역사와 땅’은 앞으로도 사서 원문과 고지명, 지형·수계·민속지명 등을 종합하여,
왜곡된 경계선을 바로잡고, 동이 문명권의 실제 모습을 회복하는 연구와 보도를 이어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