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 종이 교과서를 없애고 전자교과서로 전면 전환하자는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효율성, 비용 절감, 개인 맞춤형 학습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정작 빠져 있는 질문이 있다. 아이들의 ‘정서’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교과서는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교과서는 한 학년을 살아낸 흔적이며, 배움의 시간과 감정이 고스란히 남는 기억의 매개체다. 접힌 귀퉁이, 연필 자국, 메모와 낙서는 학습의 결과물이자 성장의 기록이다. 반면 전자교과서는 효율적이지만, 경험이 남지 않는다. 학습은 저장되지만 기억은 축적되지 않는다. 배움이 ‘소유’가 아니라 ‘소비’로 전락할 위험이 여기에 있다.
전자교과서의 장점도 분명하다. 영상과 상호작용 요소는 학습 흥미를 높이고, 틀림에 대한 부담을 줄이며, 개인의 학습 속도를 존중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학습 불안을 느끼는 학생들에게는 일정 부분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보조 수단일 때 가장 빛난다. 전면 대체가 되는 순간,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정서 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초·중학생에게 전자기기는 집중력 분산과 정서적 불안을 동시에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알림과 화면 전환에 익숙해질수록 깊이 있는 몰입은 어려워지고, 학습 후 남는 성취감은 얕아진다. “분명 공부했는데 남은 것이 없다”는 허무감은 아이들의 자기 효능감을 갉아먹는다. 이는 학습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 구조의 문제다.
더 큰 문제는 감시와 비교의 강화다. 전자교과서는 학습 시간, 정답률, 진도율을 수치로 남긴다. 이는 관리에는 유용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항상 평가받고 있다”는 정서적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 교육 환경에서 이러한 구조는 불안을 증폭시키고, 학습을 자율이 아닌 통제로 인식하게 만든다.
교실의 온도도 변한다. 종이책을 함께 넘기며 같은 페이지를 바라보던 교실은, 각자의 화면을 응시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교사는 안내자가 아닌 관리자가 되고, 학생은 배움의 주체가 아닌 사용자가 된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의 요소가 약화되는 순간이다.
교육은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의 문제다. 효율은 기술이 제공할 수 있지만, 정서적 안정과 깊이는 기술이 대신할 수 없다. 전자교과서의 활용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종이 교과서를 완전히 대체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초등 저학년에게는 종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안정적 학습 환경이 필요하고, 고학년과 중등 과정에서는 혼합형 접근이 바람직하다. 특히 인성, 정서, 사고력을 다루는 교과에서만큼은 종이 교과서의 역할을 지켜야 한다.
디지털 전환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교육 정책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전자교과서 전면화 논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는 한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될 일이다.
논설위원 주경선
본사 발행인 겸 편집장
목사,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