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12월 4일, 유엔은 총회 결의를 통해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Rights of All Migrant Workers and Members of Their Families,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이 채택된 12월 18일을 세계 이주민의 날(International Migrants Day)로 지정했다.
전 세계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상 불이익과 임금 등에서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을 촉구한 해당 협약의 정신을 이어받아, 3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이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뜻이 이 기념일에 담겨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도 잘못된 정보와 편견으로 이주민을 대할 때, 그러한 차별과 배제의 피해자는 곧 우리 사회 모두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각자가 다양한 문화와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주민의 숫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진 모든 구성원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협약이나 법률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은 더욱 중요하다.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주민들의 고충을 생각해 보면서 차별과 혐오 대신 관용과 포용을 되새겨 본다.
편의점 계산대 너머의 떨리는 손
이른 아침, 출근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든다. 계산대 너머에서 "봉투 필요하세요?"라고 묻는 목소리에는 묘한 억양이 섞여 있다. 명찰을 보니 낯선 외국 이름이 적혀 있다. 12월의 차가운 공기 속, 건설 현장의 새벽을 여는 것도, 시골 비닐하우스에서 꽁꽁 언 손으로 딸기를 따는 것도, 식당 주방에서 뚝배기를 닦는 것도 이제는 그들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12월 18일, 달력 한구석에 작게 적힌 '세계 이주민의 날(International Migrants Day)'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낯선 이방인들과 한배를 타고 있다. 거창한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된다. 이미 우리 곁에는 25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스무 명 중 한 명은 외국인이라는 이야기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단일 민족'이라는 오래된 신화를 넘어, 다문화의 거대한 파도 위로 올라탔다.
그림자로 존재하는 사람들: '쓰고 버리는' 부품이 아니다
솔직해져 보자. 우리는 그동안 이주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혹시 우리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값싼 윤활유'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는가? 인구 절벽이라는 국가적 재앙 앞에서,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수혈된 '대체 인력'으로만 그들을 소비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뼈아픈 자문을 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위험한 곳, 가장 고된 곳(3D 업종)을 묵묵히 지탱해 왔다. 한국인이 꺼리는 용접 불꽃 튀는 공장에서, 악취 진동하는 양돈장에서 그들은 땀을 흘린다. 우리는 그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식탁에 올리고, 그들이 지은 아파트에서 잠을 자면서도, 정작 그들의 존재는 투명 인간 취급하곤 했다.
뉴스를 보면 가끔 섬뜩하다. 임금을 받지 못해 거리에 나선 이들,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추위에 떨다 숨진 이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왔지만, 그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필요할 땐 "어서 오세요"라며 문을 열어주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혐오의 눈빛을 보내는 이중적인 태도. 이것이 2025년 대한민국이 감추고 싶은 민낯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한 불편한 동거를 넘어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이것은 선심이나 동정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세계 유례없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생산 가능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방 도시는 소멸 위기에 처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들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단지, '일손이 부족해서' 받아들인다는 공리주의적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기계 부품이 아니다. 감정이 있고, 가족이 있고,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인격체다. 그들을 단순히 '노동력(Human Resources)'으로만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범죄, 분열의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들이 겪고 있는 이민자 갈등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진지하게 포용하지 않고 주변부로 밀어냈을 때, 그 소외감은 사회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진정한 통합은 그들의 문화를 깡그리 지우고 ‘한국 사람처럼’ 만드는 동화주의가 아니다. 그들의 고유한 색깔을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는 '모자이크'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샐러드 볼(Salad Bowl) 안에서의 유쾌한 섞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배제'와 '차별'의 빗장을 풀고 '상생'과 '공존'의 문을 여는 것이다.
첫째, 법과 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 고용 허가제의 독소 조항을 손보고,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며 자랐는데도, 부모의 신분 때문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아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들이야말로 미래 대한민국의 자산이다.
둘째, 우리 인식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피부색, 나와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억양을 가진 사람을 볼 때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느끼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을 보며 경계심을 품기보다, 그가 오늘 하루 흘렸을 땀방울에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진정한 다문화 사회는 샐러드 볼과 같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각자의 맛과 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드레싱과 어우러져 더 훌륭한 맛을 내는 것. 이주민들의 낯선 문화가 우리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우리의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악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인천공항에는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첫발을 내딛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개척자들이다.
우리도 한때는 이주민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고,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맞으며 달러를 벌어온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들이 타국에서 흘린 눈물과 땀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이제 우리가 그 빚을 갚을 차례다. 세계 이주민의 날, 거창한 행사는 필요 없다. 그저 오늘 마주치는 외국인 이웃에게 따뜻한 눈인사 한번 건네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녕하세요,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 작은 인사가 그들에게는 이 차가운 타국 땅에서 버틸 수 있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미는 투박한 손을 맞잡을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더 넓고, 더 깊고, 더 따뜻한 나라로 성숙해질 것이다. 경계선 밖의 이방인을 경계선 안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려야 할 내일의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