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전도는 절대 타인의 신념을 무너뜨리려는 독선의 칼날이 아니다. 그것은 도저히 가슴에만 가두어 둘 수 없는 구원의 벅찬 감격이자, 한 영혼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가장 절박한 호소이다. 우리가 만난 생명의 빛이 너무도 고마워, 사랑하는 친구의 고단한 길을 그 빛으로 함께 비추고 싶은 그 떨리는 진심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전도의 시작이자 전부이다.
이러한 사랑의 간절함을 품고, 중동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오랜 친구 아메드와 차 한 잔을 나누던 그 오후의 기억을 꺼내어 본다. 서로 다른 경전을 가졌지만, '이싸(예수)'라는 이름 앞에서만큼은 우리의 눈빛이 깊게 맞닿았던 그 순간들을 말이다.
중동에서 살면서 오랜 친구 아메드와 차 한 잔을 나누던 그 오후를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책을 가졌지만, '이싸(예수)'라는 이름 앞에서만큼은 늘 눈빛이 깊어졌다. 무슬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논리로 성벽을 허무는 전투가 아니라, 서로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인간적 갈망'을 찾아내어 그곳에 생명수를 붓는 과정이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유일성을 지키면서도 따뜻한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 삶의 궤적에서 얻은 작은 지혜들을 나누고자 한다.
시작은 가장 고귀한 여인, '마리암(마리아)'으로부터 대화의 문을 여는 가장 부드러운 열쇠는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다
이슬람에서 마리아는 모든 여성을 통틀어 가장 완벽하고 정결한 여인으로 칭송받는다. "너희 꾸란에 나오는 마리아의 정결함과 인내를 참 존경해!"라는 말로 먼저 시작해 보자. 왜냐하면, 공동의 존경심은 경계의 담장을 낮추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무슬림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 속 마리아는 그 위대한 아기를 마구간 구유에 뉘었더라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아기를 가장 낮은 곳에 둔 그 마음이 우리 영혼을 깊게 울리지 않니?” 우리의 이 짧은 고백은 무슬림 친구들에게 '능력의 알라'가 아닌 '겸손의 하나님'을 상상하게 만드는 첫 번째 파동이 된다.
'기적'이 아닌 '함께 함'의 신비를 이야기하라
무슬림들에게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말하고 진흙으로 새를 만들어 날리는 기적의 예언자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과 다른 '인간 예수'의 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메드, 꾸란 속 예수는 요람에서부터 당당히 말씀을 선포하잖아? 그런데, 내가 믿는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갓난아기처럼 울며 태어났어. 배고프면 울고, 어머니의 손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그 연약함 말이야. 신이 그렇게까지 낮아져서 우리 아픔 속에 섞였다는 게 나에게는 가장 큰 기적이야."
이렇듯, 부족할 게 없고, 전지전능한 신으로만 알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스스로 제약하면서까지 인간과 친구가 되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랑은 신선한 충격이자 깊은 울림이 된다.
삶의 무게와 '임마누엘'의 위로를 연결하라
이후로 서로의 대화가 점차 깊어지면, 그들의 삶에 있는 고단함과 슬픔을 조심스레 건드려 볼 수 있다. 이슬람은 법도와 의무의 종교이기에, 무슬림들은 늘 '내가 잘하고 있나?'라는 보이지 않는 중압감 속에서 살아간다.
"인생이 정말 무겁지? 나도 그래. 그런데 내가 믿는 예수는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만 하는 분이 아니라, 내 무거운 짐을 같이 지려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다.
꾸란의 예수가 종려나무 아래서 홀로 신음하는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낸 것에 그치지 않고, 친히 사람이 되어 그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성경 속 이야기를 전해 줄 때, 무슬림 친구들의 굳어있던 종교적 자아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위로받기 시작할 것이다.
십자가의 '약함'을 사랑의 '강함'으로 번역하라
이제, 무슬림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를 설명할 때, 논쟁은 절대 금물이다. 대신, '희생'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사용해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대신 죽는 걸 보면, 우리는 그걸 약하다고 안 하고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잖아? 나에게 십자가는 바로 그런 거야.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신 사랑의 결정체가 십자가야!"
이렇게, 십자가를 형벌이 아닌, '자발적인 대속'으로 설명할 때, 그들은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은혜(Grace)의 개념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결국, 대화의 완성은 말의 유창함이 아니라 우리 눈빛에 담긴 진심이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무슬림은 우리의 신학 지식에 절대 감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고난을 겪을 때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식탁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며, 서로 빵을 나누는 우리의 '예수를 닮은 작은 모습들'에 마음을 열었다. 우리가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과 편견 없는 미소는, 수천 년간 쌓인 종교의 장벽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오늘 우리의 곁에 있는 무슬림 친구들에게 정답을 던지기보다 먼저, 그의 영혼에 말을 거는 따뜻한 숨결이 되어주기를 권한다.
오늘 우리는 무슬림 친구에게 완벽한 논리를 증명해 보일지, 아니면, 그를 위해 기꺼이 낮아진 사랑의 온기를 전할지 그건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