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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 "헤어지자"는 말이 유언이 되다

연인의 이별 통보에 흉기 휘두르는 참극

사랑싸움 아닌 명백한 '살인 예고'이자 인권 유린

스토킹처벌법의 사각지대

사진=AI생성

 

"그냥 헤어지자고 했을 뿐인데,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찾아왔어요." 최근 상담실을 찾은 20대 여성 A씨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명문대생이었다. 겉으로는 번듯해 보였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악마로 돌변했다.

 

A씨가 이별을 고하자 그는 "너 없으면 나도 죽고 너도 죽는다"며 흉기를 들고 자취방 현관문을 부쉈다. 이것은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다. 강남 건물 옥상에서 벌어진 의대생 살인 사건의 전조 증상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35년 형사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살인 현장을 봤지만, 가장 비통한 것은 '예고된 죽음'을 막지 못했을 때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교제 폭력 신고 건수는 매년 폭증하고 있으며, 애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살인 미수에 그친 피해자는 3일에 1명꼴이다. 사랑했던 사람의 손이 가장 잔혹한 흉기가 되는 현실, 대한민국에서 '안전 이별'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목숨을 걸어야만 연인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사회가 정상인가.

 

거제에서 발생한 전 여자친구 폭행 치사 사건은 우리 법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알아내 침입했고,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피해자는 10일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숨졌지만, 수사기관은 초기에 '인과관계 불명'이라며 가해자를 풀어줬다.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는 거리를 활보하고, 유족만이 피눈물을 흘리며 1인 시위를 해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법은 과연 누구 편인가.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현행법상 교제 폭력은 별도의 처벌법이 없어 폭행이나 협박죄가 적용된다. 문제는 이 죄목들이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라는 점이다.

 

가해자가 "한 번만 봐달라"고 빌거나, 반대로 "신고하면 가족까지 가만 안 둔다"고 협박하면, 공포에 질린 피해자는 처벌 불원서를 써줄 수밖에 없다. 경찰은 뻔히 위험해 보이는 가해자를 훈방 조치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 순간, 비극의 카운트다운은 다시 시작된다.

 

단순한 신체적 폭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누구랑 있었냐", "치마가 왜 짧냐"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정서적 폭력'이 교제 폭력의 시작점이다. 스마트폰 위치 추적 앱을 몰래 설치하거나, SNS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행위를 사랑이나 관심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명백한 '가스라이팅'이자, 상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여기는 범죄 심리다.

 

피해자들은 신고조차 두려워한다. 스토킹처벌법이 생겼다지만, 법원은 여전히 구속 영장 발부에 인색하다.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봤자, 마음먹고 찾아오는 가해자를 막을 물리적 방패가 없다. 스마트워치 하나에 의존해 숨죽여 사는 피해자들에게 국가는 "네가 조심했어야지"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피해자가 안심하고 숨 쉴 곳이 없는 나라에서 출산율 반등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제는 국회가 응답해야 한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됐던 '교제폭력처벌법'은 논의조차 제대로 못 하고 폐기됐다. 22대 국회는 달라야 한다.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하고,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즉각 분리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연인 간의 일은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는 낡은 인식은 버려야 한다. 집 안에서, 차 안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에 공권력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내일 뉴스에 나올 피해자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은 존중을 전제로 한다. 상대방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범죄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왜 그런 남자를 만났냐"고 묻는 대신, 가해자에게 "감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단호하게 꾸짖어야 한다. 이별을 말하는 것이 유언이 되지 않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최소한의 인권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사진=전준석 칼럼니스트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감수성, 4대폭력 예방, 자살 예방 및 직장 내 장애인 인식 개선, 인권 예방, 리더십 코칭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작성 2026.01.22 07:00 수정 2026.01.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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