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진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갈증 중 하나다. 우리는 흔히 진리가 거대한 성전, 화려한 의복을 입은 종교 지도자, 혹은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2천년 전 일어난 주님의 나타나심, 즉 주현(主顯, Epiphany)의 사건들은 우리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처참하게 깨뜨린다.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왕궁이 아닌 들판의 별을 보던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해졌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요단강가에서 울려 퍼졌으며, 그분의 신성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굶주린 광야에서의 침묵과 거절을 통해 증명되었다.
주현절은 단순히 과거의 기념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워둔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 벽을 향해 던져진 거대한 폭탄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믿는 신념이 오직 '우리'만을 위한 것이고, '타자'를 배제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주현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주현절은 신이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며, 인간이 만든 모든 배타적 경계선을 지워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파격적인 포용의 미학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
주현, 신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역사적으로 주현절은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도시를 방문하거나, 신이 인간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 단어를 과감하게 차용하여, 로마 황제가 아닌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우주의 통치자임을 선포했다. 4세기 서방 교회에서 성탄절이 강조되기 전까지,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절을 통해 예수의 탄생과 세례, 그리고 그분의 사역 시작을 한꺼번에 기념했다.
이 절기의 배경에는 극심한 유대주의적 배타성과 로마의 압제적 위계질서가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직 자신들만을 위해 올 것이라 믿었고, 로마인들은 힘과 권력이 곧 신성이라 믿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주현절은 세 가지 사건을 근거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한다. 동방박사라는 외인을 통해 '혈통'을 넘어서고, 세례를 통해 '종교적 권위'를 재정의하며, 광야의 시험을 통해 '세상적 가치'를 전복시킨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 구조를 뿌리째 흔드는 사회경제적이며 종교적인 혁명이었다.

배제된 자들의 축제와 권력의 불안
사회학적 관점에서 주현절의 세 가지 사건은 '타자성(Otherness)'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첫째, 동방박사의 등장은 당시 정통 유대교인들에게는 신학적 테러와 같았다. 점성술을 연구하던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했다는 사실은 '구원'이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님을 입증한다. 현대의 다양한 사례가 보여주듯 폐쇄적인 시스템은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결국 붕괴하지만, 외부의 자극과 연결된 시스템은 생명력을 얻는다. 주현절은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지역 종교를 넘어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는 큰 전환점이었다.
둘째, 예수의 세례는 공적 선언이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겸비(Humiliation)', 즉 자신을 낮춘 '낮아지심'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죄 없는 자가 죄인의 줄에 서서 세례를 받는 장면은 위계질서의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다.
셋째, 광야의 시험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자아의 승리'이자 '권력의 거부'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경제적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종교적 허영,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정치적 야욕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진정한 신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사건의 결합이 '보편적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본다.
세 가지 사건이 증명하는 포용의 논리
주현절을 구성하는 세 가지 사건은 하나의 논리적 정합성을 이룬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건을 함께 보아야 한다.
첫째, 동방박사 사건은 '수평적 확장'을 논증한다. 진리가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공간과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공간을 넘어 전 우주로 확산됨을 보여준다. 만약 신이 보편적이라면, 그분은 반드시 '가장 먼 곳에 있는 이'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수세(세례)는 '수직적 연대'를 논증한다.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음성은, 신성이 인간의 가장 낮은 곳, 즉 죽음의 상징인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확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신이 인간의 고통과 완전히 연대하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광야의 시험은 '본질적 구별'을 논증한다. 세상이 말하는 신성은 '지배'와 '소유'에 있지만, 주현절이 선포하는 신성은 '포기'와 '말씀'에 있다.
이 세 가지 논리가 함께할 때, 주현절은 비로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동방박사), 누구와도 연대하며(세례),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걷는(시험)" 기독교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이것이 바로 주현절이 선포하는 파격적 포용의 미학이다. 구원은 높은 성벽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와 강가와 저 먼 이국땅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 성벽은 무너졌는가?
주현절의 빛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만의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그 안에 진리를 가두려 하지 않는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길을 떠났던 그 용기, 예수가 죄인의 줄에 섰던 그 겸손, 그리고 광야에서 화려한 유혹을 물리쳤던 그 단호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다. 기독교 신앙은 건물의 크기나 교리의 정교함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넓은 가슴으로 타자를 품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진정한 주현(Epiphany)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예수가 누구신지'가 드러날 때 완성된다. 혐오의 언어를 멈추고 환대의 식탁을 차릴 때, 권력의 유혹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현절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2천 년 전의 별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 당신의 손끝과 발끝에서 다시 빛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그 빛을 감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온 세상에 비출 것인가?
주현절은 '드러남'의 신비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은 가장 감추어진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목사로서 바라보는 주현절의 핵심은 '경계의 파괴'이다. 신이 인간이 되셨고, 의인이 죄인의 자리에 섰으며, 왕이 나그네의 경배를 받았다. 이 거룩한 뒤섞임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가 세운 모든 인위적인 벽을 허물고, 주현의 빛 아래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신앙의 회복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