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발은 어디를 향해 구부러져 있는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자기만의 성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사람과, 그 문을 열고 누군가를 향해 발을 내딛는 사람이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 '기멜(ג)'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신비주의 랍비들과 언어학자들은 이 글자의 형상에서 '앞을 향해 발을 내딛는 사람' 혹은 '길게 뻗은 낙타의 목과 다리'를 발견한다. 흥미롭게도 앞선 글자인 '베트(ב)'가 안정적인 '집'을 상징했다면, 기멜은 그 안식처에서 나와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는 역동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도발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이 소유한 그 안락함과 풍요는 과연 누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은혜와 복을 '정지된 호수'처럼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지, 내 창고가 얼마나 가득 찼는지가 성공의 척도가 된다. 하지만 기멜은 이러한 정적인 가치관을 산산조각 낸다. 기멜의 본질은 '흐름'에 있다. 히브리어 전승에서 기멜은 그 뒤에 오는 네 번째 글자 '달렛(ד, 가난한 자 혹은 문을 상징)'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부자를 의미한다. 소유가 소유로만 머물 때 그것은 고인 물처럼 썩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타자의 결핍을 향해 달려갈 때 비로소 거룩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당신의 발걸음이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향해 굽어 있다면, 당신은 아직 기멜의 신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 고요한 문자가 품은 폭발적인 실천의 논리는, 이기주의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가장 파격적인 경고이자 초대장이 된다.
광야의 생명선, 낙타와 보상의 연대기
기멜(ג)의 어원은 '가말(גָּמָל, Gamal)'이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낙타'를 뜻한다. 고대 근동의 척박한 광야에서 낙타는 단순한 짐승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낙타는 수백 킬로미터의 사막을 횡단하며 물 한 모금 없이도 버텨내는 '인내'의 상징이자, 유목민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낙타가 없으면 교역도, 이동도, 생존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기멜은 태생적으로 '먼 거리를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힘'과 '결핍을 견뎌내는 성숙함'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그 뿌리에 두고 있다.
또한 '가말'이라는 단어에는 '젖을 떼다'라는 뜻과 '보상하다(repay)' 혹은 '친절을 베풀다'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젖을 뗀다는 것은 어머니라는 절대적인 의존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한 명의 성숙한 인격체로 서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기멜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묻는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보상이란 단순히 빚을 갚는 행위를 넘어, 공동체의 깨어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잉여의 자원을 결핍된 곳으로 흘려보내는 도덕적 경제 행위였다. 즉, 기멜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의 낙타가 되어주는 거룩한 연대의 역사를 배경으로 탄생한 글자다.

기멜과 달렛,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신비로운 조우
기멜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문학적 관점은 알파벳 배열 순서에 담긴 의미다. 왜 기멜(ג)은 달렛(ד) 앞에 서 있는가? 탈무드에 따르면 기멜은 '고멜 하사딤(Gomel Chasadim, 친절을 베푸는 자)'을, 달렛은 '달(דַּל, 가난한 자)'을 상징한다. 기멜의 발이 달렛을 향해 뻗어 있는 이유는,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문 앞까지 직접 찾아가 도움을 주어야 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영적ㆍ상징적 의미를 분석하는 카발라 전통에서는 이를 '능동적 복지'의 원형이라고 분석한다. 가난한 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가진 자가 먼저 그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논리다.
더 나아가 신학적 관점에서 기멜은 '3'이라는 숫자를 의미한다. 1(알레프)이 유일성을, 2(베트)가 관계를 상징한다면, 3(기멜)은 그 관계가 낳은 '결실'과 '완성'을 뜻한다. 부모(1, 2) 사이에서 자녀(3)가 태어나듯,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반드시 제3의 영역인 '이웃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사회적 견해에 따르면, 현대의 소득 불평등 문제는 자원의 절대적 부족 때문이 아니라 '기멜의 발걸음'이 멈췄기 때문에 발생한다. 각종 통계나 데이터들은 자본의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기멜의 신학은 그 회전의 방향이 반드시 '낮은 곳'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의 통합은 기멜이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사회 시스템 전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영적 원리임을 시사한다.
잉여는 소유가 아니라 사명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계발'과 '자아실현'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나만을 위한 발걸음을 훈련받는다. 하지만 기멜이 제시하는 경제학은 정반대의 논리를 펼친다. 잉여 자원은 당신이 잘나서 얻은 전유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잠시 맡겨진 '보관물'이라는 것이다. 낙타가 혹 속에 지방을 저장하는 이유는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짐을 지고 광야를 건너기 위해서다. 만약 낙타가 짐 지기를 거부하고 지방만 축적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볼 때, 진정한 독립은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니라, 비로소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넘어 타인의 결핍을 보는 눈을 가진다. 왜 우리가 기멜처럼 달려가야 하는가? 그것은 '순환의 법칙' 때문이다. 내가 오늘 기멜이 되어 달렛에게 다가갈 때, 언젠가 내가 달렛(가난한 자)의 처지가 되었을 때 또 다른 기멜이 나를 향해 달려오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생존 전략이다.
또한 기멜이 가진 '보상'의 의미를 깊이 고찰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열매로 보상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성화'의 과정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발은 여전히 내 집(베트)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기멜의 역동성을 부정하는 기만이다. 기멜의 발이 달렛을 향해 꺾여 있는 그 각도만큼이 우리 신앙의 깊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시간, 지식, 물질이라는 잉여를 결핍의 현장으로 흘려보낼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숫자는 2에서 3으로, 즉 불완전한 관계에서 거룩한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의 기멜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는가?
기멜(ג)은 우리에게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젖을 뗀 아이처럼 평온한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결핍에 전전긍긍하며 채우기에만 급급한가?" 시편 기자는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있음같이 내 영혼이 평온하다고 고백했다(시 131:2). 이는 외부의 조건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모든 공급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평안이다. 이 평안을 소유한 자만이 비로소 기멜이 되어 광야로 뛰어들 수 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알레프에서 시작되어 베트에 머물다 기멜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 만약 당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의 발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 혹시 거울 속의 자신만을 바라보느라 고개가 빳빳하게 굳어 있지는 않은가? 기멜처럼 고개를 숙여 낙타처럼 짐을 지고, 다리를 뻗어 이웃의 문(달렛)으로 달려가는 삶에는 공허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미래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자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흐르게 하는 자의 것이다. 소음과 분열의 시대에 기멜이 보여주는 '달려가는 은혜'는 세상을 치유하는 유일한 처방전이다. 기멜은 '겸손한 풍요'를 가르친다. 낙타가 주인 앞에 무릎을 꿇어야 짐을 실을 수 있듯이, 우리도 신 앞에 무릎 꿇을 때 비로소 이웃을 위한 짐을 실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잉여가 누군가의 결핍을 채우는 기적이 되길 기도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오늘 당신이 내딛는 그 작은 발걸음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사막에서 만난 낙타와 같은 생명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의 마음은, 그리고 발걸음은 지금 누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그 발걸음의 끝에서 당신은 비로소 당신을 향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더 큰 '기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언약성경연구소에서는 '기믈'을 한글 표준 표기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 칼럼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멜'로 표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