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력의 시계바늘이 성탄 절기(Christmas Season)의 끝자락과 주현 절기(Epiphany)의 절정을 가리킬 때, 우리는 요단강 가에 서게 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던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지나고, 이제 서른 즈음의 청년 예수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바로 '주님수세주일'이다. 이 날의 기원은 단순히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물로 씻김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 한 줄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대 교회는 이 사건을 성탄, 동방박사의 방문,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과 함께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거대한 '주현(顯現, Epiphany)'의 사건으로 묶어 기념했다.
이날의 의미는 실로 심오하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순간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 속에 동시에, 그리고 극적으로 현현하신 최초의 사건으로 묘사한다. 아들(성자)이 물속에 잠기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며, 아버지(성부)의 음성이 하늘을 가르고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이 우주적인 선포는 나사렛 목수 예수의 공적 사역(Public Ministry)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취임식과도 같다. 마구간의 탄생이 은밀한 시작이었다면, 요단강의 세례는 온 세상을 향한 메시아의 대관식인 셈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날을 기점으로 성탄의 화려한 불빛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고뇌와 사역을 따라가는 '주현절 후 기간' 혹은 '연중 시기(Ordinary Time)'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 장엄한 장면 이면에는 당혹스러운 신학적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당시 세례요한의 외침은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과 타락한 백성들을 향한 서슬 퍼런 경고였다. 죄인들이나 들어가야 할 그 혼탁한 요단강 물에, 거룩하신 분이 발을 담그신 것이다. 요한조차 이를 만류했으나,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답하신다. 여기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줄 맨 끝에 서서,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하겠다는 파격적인 연대의 선언이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가, 이제 죄인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요단강의 입수를 통해 더 구체적이고 처절하게 현실화된 것이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이 2천 년 전의 사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종교개혁 신학의 전통에서 주님의 수세는 곧 '우리 세례의 원형'으로 해석된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개인의 신앙 결단이나 교회 회원이 되는 입교 의식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님수세주일은 우리의 세례가 그토록 가벼운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우리가 세례반 앞에서 물을 뒤집어쓸 때, 우리는 단순히 한 교회에 등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들어가셨던 그 요단강 물결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연합의 신비다.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듯, 우리의 세례 때에도 우리 영혼의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셨음을 재확인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주님수세주일은 우리에게 안주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고, 이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치열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세례는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어쩌면 '요단강변의 구경꾼'으로 머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세례가 주는 은혜와 감격에는 젖어 있지만, 세례 받은 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과 세상 속에서의 고난은 외면하려 한다. 주님이 물과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세례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 속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평신도의 임직식'이다. 성령은 교회당 안에만 머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 한복판으로 파송하기 위해 오셨다.
결론적으로 주님수세주일은 우리 정체성의 근본을 묻는 날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연봉, 지위, 외모를 가지고 "네가 누구냐"고 묻고 시험한다. 마치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며 조건을 달고 시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의 소란스러운 평가 속에서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들려왔던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선포가, 세례 받은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 이 확고한 신분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수세주일을 맞아 당신의 세례를 기억하라. 비록 물은 말랐을지라도, 그때 임하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열린 하늘 밑에서 살아가는 존귀한 자답게, 이제 구경꾼의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의 삶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요단강에서 시작된 그 거룩한 물결이 당신의 삶을 통해 이 메마른 세상으로 흘러가야 한다.
[ 허동보 목사 ]
ㆍ現 수현교회 담임목사
ㆍ現 수현북스 대표
ㆍ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석사(M.Div)
ㆍ미국 Covenant University 신학석사(Th.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