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③ 동이
경계 이전의 동아시아
― 황해 내해권의 길, 수계의 논리, 그리고 연안 취락과 유물의 연속 ―
황해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흔히 “사이에 있는 바다”라고 말한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갈라놓는 경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식은 극히 현대적인 산물이다.
오늘의 황해는 국경선과 함께 인식되지만, 고대의 황해에는 국경선이 없었다.
더구나 황해는 깊은 외해가 아니라, 얕고 넓은 내해에 가깝다.
얕다는 것은 단지 수심의 문제가 아니다.
얕은 바다는 섬과 여울, 갯벌과 조류를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의 길을 형성한다.
바다는 막음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이어짐의 공간이 된다.
1회에서 지적했듯, 동부 해안의 고대 유적을 요하문명권과의 연속 없이 설명하는 순간,
그 유적은 설명의 중력을 잃고 공중에 떠버린다. 이는 단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 설정의 문제다.
황해를 경계로 설정하는 순간 유적의 연결성은 끊어지고, 황해를 내해로 놓는 순간 유적은 동질성을 갖는다.
내해는 교류를 설명하는 전제이며, 단절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해석일 뿐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 내해권이 단지 가설이 아니라,
지형·수계·고고학 유물 분포·문헌 인식이 동시에 지지하는 구조로 전환됨을 단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황해 = 내해’의 성격과 인간의 이동 감각
외해는 두려움이 앞서고, 내해는 익숙함이 먼저다.
황해는 대양처럼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 어려운 바다가 아니다.
조차가 크고 연안이 길게 펼쳐지며, 수많은 갯벌과 얕은 수역, 섬들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은 사람에게 “건널 수 있다”는 감상보다 먼저 “오갈 수 있다”는 감각을 준다.
조차가 큰 바다는 갯벌을 만들고, 갯벌은 곧 식량 창고가 된다.
조개·게·어패류·해조류는 안정적인 생존 기반을 제공하며, 이는 취락의 지속성을 높인다.
취락이 지속되면 기술이 축적되고, 제의가 형성되며, 집단 간 교류가 일상화된다.
내해는 이동만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정착과 교류가 동시에 가능한 생활권이다.
이 점에서 요하문명권 집단의 남하와 황해 연안 집단의 형성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해권으로 흡수되며 문화적 연속을 남겼다는 설명이 가장 적은 가정으로 많은 현상을 설명한다.
2. 수계가 먼저 연결되고, 국경은 나중에 생긴다
고대인은 육로보다 수로에 익숙했다. 육로는 산과 숲, 습지에 막히지만, 강과 바다는 길을 제공한다.
따라서 고대 문명권은 대체로 수계를 중심으로 묶인다.
황해 내해권 역시 바다만의 공간이 아니라, 그 바다로 흘러드는 거대한 강들의 집합체였다.
요하 계통의 강들은 내해로 이어지고, 산동·강소 연안의 하천들 역시 황해로 흘러든다.
이 땅의 서쪽에서도 대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 등이 모두 황해로 유입된다.
이때 강어귀는 어로·농경·교역·이동이 집중되는 결절점이 된다.
내해권 문명은 단순한 연안 문화가 아니라, 해안선과 강어귀가 결합된 복합 수계 문명이다.
이 구조 속에서 이동은 대항해가 아니라, 연속 이동이다.
연안을 따라 이동하고, 섬을 거쳐 가며, 강어귀에서 다시 내륙으로 들어간다.
황해는 단절의 바다가 아니라, 이동을 잘게 쪼개는 바다였다.

3. 유적과 유물이 보여주는 내해권의 실재
이 내해권 연속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고고학적 유물이다.
황해를 사이에 두고 분포하는 청동기 유물, 특히 비파형 동검은 단절이 아니라 확산과 공유를 전제로 해야만 설명된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서북부와 요동뿐 아니라, 산동 반도와 그 남쪽 연안까지 산재한다.
이는 단일 정치체의 확장이 아니라, 내해권을 매개로 한 기술·권위 표상의 공유를 시사한다.
고인돌 분포 역시 중요하다. 현 요동·요서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하지만,
산동성·강소성·절강성 등 황해 및 그 연안 남부 지역에도 분명한 고인돌 유적이 존재한다.
이들 모두는 “중원 중심 확산”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분포다.
오히려 내해권을 따라 형성된 취락 네트워크 속에서, 특정 장례·제의 형식이 선택적으로 수용·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물 분포는 황해를 경계로 설정하는 순간 설명이 막히고, 황해를 내해로 설정하는 순간 설명이 열린다.
4. 동이라는 이름 이전의 세계
‘동이’는 자칭이 아니라 타칭이다. 그렇다면 이 이름이 고착되기 이전, 내해권의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들의 세계는 방위가 아니라 물길로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강을 따라 사는가, 어느 내해를 공유하는가가 더 중요한 구분이었다.
그러나 중원 중심의 국가 서술이 강화되면서, 이 복합적인 내해권 세계는 “동쪽”이라는 하나의 방향 개념으로 단순화되고,
그 위에 ‘夷(이)’라는 표지가 덧씌워진다. 실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서술의 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5. 삼국의 ‘기이한 잔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이 지점에서 하나의 오래된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지명으로 보는 고구리·백제·신라가 대륙에서 건국과 멸망을 겪었음에도,
왜 그 유적과 유물이 이 땅(소위 한반도)에도 엄청나게 잔존하고 있는지,
나아가 어찌 일본열도에는 삼국과 가야를 뜻하는 지명이 수없이 남아 있는가.
이 질문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황해를 경계로 놓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황해를 내해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이동과 존재 및 동질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화하족의 기록 체계는 ‘海’를 실체적 해양이 아니라 경계 개념으로 인식했고,
그 결과 황해를 생활권으로 삼았던 집단—곧 동이 계통—의 이동과 분포를 구조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6. 화하족에게 보이지 않았던 바다
『爾雅(이아)』에서 四海(사해)가 「釋地(석지)」에 배치되고,
『山海經(산해경)』에서 ‘해내·해외’가 저지와 고지를 가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더라도,
송본 지리지장도에서 바다가 철저히 공백으로 처리되는 이유는 하나로 수렴된다.
화하족의 지리 인식에서 海는 해양이 아니라, 인식이 멈추는 경계였다.
황해를 직접 접하고 살아간 육지는 오래도록 동이의 영역으로 인식되었고,
그 때문에 황해는 화하 세계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구조화되지 않은 바다, 곧 보이지 않는 바다로 남았다.
황해는 존재했지만, 화하족의 세계에서는 끝내 내부화되지 못했다.
동해는 바다의 이름이기 전에, 소위 화하족에게는 세계가 끝나는 자리의 이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