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는 스스로 심폐소생술을 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려 애쓴다. 이때 누군가 구명조끼를 던져준다면, 당신은 그것을 '선택'하여 잡을 수 있을까? 대다수 현대인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내 의지로 구명을 선택하고, 내 힘으로 그것을 붙잡아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허우적거리는 생존자'가 아니라, 이미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시체'다. 죽은 자가 과연 자신을 구원하러 온 손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구원의 결정권은 결국 나에게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게 들린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주장은 가장 위험한 독초로 분류되었다. 5세기 교회는 이를 '펠라기우스주의'라 명명하고 이단으로 단죄했다. 왜 교회는 인간의 선택권을 존중하라는 이 매력적인 제안을 그토록 무섭게 거부했을까? 그것은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순간, 십자가의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로마의 타락과 펠라기우스의 '선한 의지'
역사적으로 펠라기우스 논쟁은 410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출신의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당시 로마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방종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니 어쩔 수 없다"라며 죄 뒤에 숨어버린 신자들을 보며, 그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즉,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펠라기우스의 이러한 '낙관론'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아담 이후 '죄로 기울어진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통찰했다. 인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지 자체가 이미 오염되어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죄악된 방향으로만 향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에게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모범'이 결합된 합작품이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구원은 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은총'이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 말다툼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구원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싸움이었다.

전문가와 데이터를 통해 본 인간의 한계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레스는 그의 저서 『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인간의 자율적 종교'라고 정의한다. 이는 현대 심리학과 자기계발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당신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거나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운명을 만든다"는 긍정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의 현대적 변용이다. 그러나 실제 데이터와 사회적 현상은 인간의 선택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자유롭기보다는 환경과 본능, 인지적 편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 왔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자유의지'를 과신하는 사회일수록 실패한 이들에 대한 정죄가 가혹해진다. "네가 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라는 논리는 복음이 아니라 냉혹한 인과응보의 율법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의 모든 기능이 죄의 영향권 아래 있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을 결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비참한 상태를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이 비참함을 인정할 때만 참된 은혜의 문이 열린다.
왜 '나의 선택'은 구원이 될 수 없는가
만약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절대적 구원'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 자료'로 전락한다. 펠라기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는 '훌륭한 스승'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엡 2:1)라고 단언한다.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라 다시 살리는 생명이다.
또한, 인간의 선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오늘 선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내일 악을 선택한다면 나의 구원은 취소되는 것인가? 나의 의지는 변덕스럽고 나약하다. 구원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기독교가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만큼 강하지 않다. 은총이 먼저 찾아와 우리의 닫힌 눈을 뜨게 하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응답할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은총의 선행성'이라 부른다. 선을 선택하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
오만을 버리고 은혜의 바다로
우리는 지금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거대한 신화 속에 살고 있다. "선과 악 중에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다"라는 말은 현대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달콤함 뒤에는 내가 내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저주가 숨어 있다. 우리가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도덕적 강박과 자아 숭배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선한 선택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오직 나를 붙드시는 그분의 손길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가? 기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찬양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불가능성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종교다. 펠라기우스의 오만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났던 그 경이로운 은총의 바다에 몸을 맡길 수 있다. 당신의 구원은 당신의 선택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열렬한 선택이다.
복음은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격려가 아니라, '당신은 할 수 없기에 내가 대신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 역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삶은 '노력'에서 '감사'로 바뀐다.
* 참조: 알리스터 맥그레스 저, 『신학이란 무엇인가』(서울:(주)복있는사람, 2021), pp.69-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