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의 얼굴이 화면 한가운데서 서서히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다기보다 흩어진다. 이마에서부터 머리칼 대신 꽃들이 피어나고, 꽃잎들은 다시 색채의 입자가 되어 공기 속으로 퍼져간다. 눈은 감겨 있고, 입가에는 미세한 미소가 머문다. 고요하지만 비어 있지 않고,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다. 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물화’를 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게 하지만, 곧 ‘감정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백종찬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가 확립한 ‘백종찬 수묵임파스토디지털’ 세계관이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응축된 형태로 구현된 결과물이다. 수묵의 구조적 호흡 위에 임파스토의 물성을 얹고, 디지털 레이어를 통해 확산과 회오리의 감각을 증폭시키는 그의 방식은 이 작품에서 ‘얼굴 → 꽃 → 색 → 감정’으로 이어지는 연쇄 변환 구조를 완성한다.
얼굴은 주인공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의 얼굴은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의 하단부에 조용히 머물며, 상단으로 갈수록 존재는 흐려진다. 눈을 감은 표정은 감상자를 바라보지 않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이는 초상화의 전통적 기능인 ‘정체성의 고정’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작가는 얼굴을 하나의 ‘그릇’으로 사용한다. 감정이 머무르다 넘쳐흐르는 그릇, 그리고 결국 비워지는 공간으로서의 얼굴이다.
머리칼 대신 피어난 꽃들은 특정 품종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노랑, 분홍, 보라, 흰색이 서로 겹치며 정확한 경계를 허물고, 꽃인지 색의 파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는 자연을 재현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감정의 상태를 시각화하기 위한 장치다. 기쁨, 위로, 그리움, 희망 같은 감정들은 단일한 색이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꽃들이 끊임없이 섞이고 흩어지는 이유다.
임파스토,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은 두께
백종찬 작가의 작업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두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임파스토는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거친 질감이나 물질의 과시와는 결이 다르다. 붓질은 분명히 쌓여 있지만,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다. 칼날처럼 튀어나오기보다 숨결처럼 번진다. 두께는 존재를 주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시간을 쌓아 올리는 기록으로 작동한다.
특히 배경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꽃으로 이어지는 붓 터치는 파도처럼 반복되며 화면 전체에 리듬을 만든다. 이 리듬은 정적인 평온이 아니라, 서서히 가라앉는 감정의 호흡에 가깝다. 감상자는 이 흐름을 따라가며 ‘보고 있다’기보다 ‘잠기고 있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수묵의 구조, 디지털의 확산
이 작품의 기반에는 분명 동양화적 사고가 자리한다. 선으로 형태를 고정하기보다, 여백과 흐름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먹의 번짐을 연상시키는 색의 확산,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모호한 화면 구성은 전통 수묵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결과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은 ‘효율’이 아니라 ‘확산’을 위해 사용된다. 붓질 하나하나가 복제되고 증폭되며, 감정의 잔향처럼 화면 전체로 퍼진다. 이는 디지털을 차갑고 계산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일반적 방식과 다르다. 백종찬에게 디지털은 감정을 얇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멀리까지 보내는 매개다.
치유는 설명되지 않고, 느껴진다
이 작품이 강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치유’를 말하면서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 어디에도 직접적인 메시지나 상징의 강요는 없다. 대신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은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게 된다. 지친 날의 마음일 수도 있고,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꽃들은 위로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은 선언이 아니라 상태다. 이미 위로받은 뒤의 표정, 혹은 위로받는 중의 고요함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곁에 앉아 있는 존재처럼 작동한다.
서명과 낙관, 마침표로서의 완성
화면 우하단에 자리한 서명 “Baek Jong Chan”과 붉은 낙관 “白鍾讚 印”은 장식이 아니라 마침표다. 감정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이 모든 층위가 한 작가의 세계관에서 출발했음을 분명히 한다. 동양적 인장과 서양적 서명이 공존하는 이 배치는 작품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통과 현대, 수묵과 디지털, 개인의 감정과 보편적 치유가 한 화면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개인의 내면에서 공공의 감정으로
백종찬의 이번 작품은 개인의 감정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그 귀결은 매우 공공적이다. 빠른 속도와 과잉 정보 속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멈춤’의 경험을 제공한다. 감상자는 이 앞에서 서두를 이유를 잃는다. 그리고 그 잠깐의 정지는,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위로가 된다.
이 작품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백종찬의 화면은 그 질문에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간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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